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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비지 Nov 11. 2021

무지개다리를 찾아서

순천 선암사 승선교


오랜만에 무지개를 봤다. 아니, 차라리 '만났다'는 편이 낫겠다. 먼 하늘 한편에 언뜻 비치는 손바닥만 한 그런 무지개 말고 이렇게 딱 눈앞에서 마주친 초대형은 처음이다. 장마가 폭염으로 바뀌는가 싶던 지난여름 어느 해 질 녘이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뿌려놓은 공기 중의 미세한 물방울 입자에 노을빛이 부서져 뿌연 하늘 위로 오색빛깔 향연이 펼쳐진 것이다. 심사숙고를 마친 어느 대가가 마침내 자세를 바로 하고 조심스레 붓을 들더니, 단숨에 휙 그어버린 한 획처럼 무지개는 그렇게 무심히, 낮도깨비 같이 홀연히 나타났다. 느닷없는 '저 세상 풍경'에 황급히 차를 세우고 그 천연의 황홀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예고 없이 훅 왔다 금세 사라지는 무지개는 그래서 더 애가 닳는다. 물끄러미 쳐다보자니 영화 '쇼생크 탈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높은 담벼락에 에워싸인 교도소 운동장의 침울한 정적을 깨고 뜬금없이 오페라가 울려 퍼진다. 어슬렁거리던 수인들은 화들짝 얼어붙은 듯 채 일제히 고개 들어 스피커를 쳐다본다. 갑자기 벌어진 초현실적 상황. 당혹과 불안이 역력한 일그러진 표정. 수초 간의 난감한 정적이 흐르고 이내 사람들은 허공을 가르며 자유로이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처럼 운동장 하늘 위로 맑게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점점 아득히 빠져든다. 세상과 단절된 수인들의 애환과 아리아의 서정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 이 명장면에 흐르는 곡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다.


산들바람 이는 해 질 녘 들판에서 한 폭 그림인 듯 천상의 오페라인 듯 찬란한 무지개를 보고 나니 문득, 무지개다리가 생각났다.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순천 선암사 무지개다리를 보고 왔다.

 

천관산에 걸친 무지개.(2021년 7월. 전남 장흥.)


한국 전통 건축에는 무지개 형상에 이름도 무지개다리인 구조물이 있다. 무지개 '홍', 무지개 '예', 홍예교. 돌을 가공해 무지개 모양으로 쌓아 만든 것이 홍예교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위 사진은 홍예교의 구조를 설명하기 쉽게 찍혔다. 도로를 냇물이라면, 왼쪽 야산에서 오른쪽 천관산 정상까지 강물을 건너는 무지개가 뻗쳐 있다. 물 양 옆의 언덕배기를 무지개 모양으로 연결해 돌을 쌓고, 그 상면에 보행이 가능하도록 평평한 길을 내면 홍예교가 된다.  


돌로 만든 무지개 형태의 구조물은 다리 말고도 많다.

쉽게 볼 수 있는 예로 성곽의 출입문이 홍예 구조다. 광화문, 숭례문, 흥인지문 같은 궁성과 도성의 성문을 비롯해 전국 각지 읍성의 출입문도 무지개 형상이다. 조선시대 관청이 겨울철에 얼음을 채취해 보관했던 석빙고도 실은 홍예 구조다. 수문으로는 수원화성 화홍문에 홍예를 무려 7간이나 연접해 놓은 것도 있다. 홍예교 가운데 격식 있는 구조물로는 경복궁 영제교, 창덕궁 금천교, 창경궁 옥천교처럼 궁궐 정문 안쪽에 놓인 예가 있다. 특히 경주 불국사 경내 진입문을 오르는 석축 아래에 놓은 홍예교(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는 다리로서의 실용적 기능을 벗어나 종교적 상징을 나타내는데, 극강의 공을 들여 만든 사례다. 이처럼 무지개 형태 석조물은 종류와 사례가 많고 남아있는 유물도 풍부하다.


그중 순천 선암사 입구에 놓인 승선교는 전국의 홍예교 가운데서도 규모가 크고 아름답기로도 손에 꼽힌다.


승선교. 불규칙한 자연암반 위에 놓여 좌우 기단석의 높이가 서로 다르다. (2021년 7월. 순천.)


여행자를 압도하는 승선교의 아름다움은 입지에서 비롯한다. 흔히 홍예교들이 궁궐이나 읍성의 너른 대지위에 들어선 것과 대조되게 승선교는 경관이 빼어난 깊은 계곡에 자리 잡았다. 사찰 경내를 향하는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오르는 길이 암반이나 벼랑에 막혀 물을 건널 때 홍예를 틀고(돌로 무지개 형태의 구조를 축조하는 일) 다리를 놨다. 계곡 이편저편으로 길이 오가면서 다리는 두 개가 되고, 승선교와 그 아래 작은 또 하나의 홍예교가 한 쌍을 이룬다. 계곡 주변의 비경과 홍예교의 조형미가 어우러져 '신선의 세계에 오르는 다리'라는 이름처럼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선 기분마저 든다.


승선교의 변칙적인 쌓기 방법은 전통건축의 구조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흥밋거리다. 대부분의 홍예교가 지반을 단단히 다진 평평한 바닥 위에 축조된 것과 달리 승선교는 바닥이 불규칙한 자연암반 위에 만들었다.    


건축구조적으로 볼 때 홍예교는 돌을 파거나 깎아서 나무처럼 짜 맞추지 않고, 쌓기만으로 독립적인 구조체를 이룬다. 석재는 압축력에 견디는 힘이 강하고 마찰력이 큰 재료다. 돌의 이 두 가지 성질만을 이용해 독립적인 구조체를 만든 것이 홍예교다. 원리는 단순하다. 여러 개의 주사위를 일렬로 붙여 세우고 양쪽 끝을 안으로 밀어 압축력을 가하면 주사위 여러 개를 통째로 들어 올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정하게 가공된 돌을 양 측면에서 쌓아 올리면서 생기는 압축력이 홍예교 가운데 돌들을 지지함으로써 무지개가 공중에 떠 있는 형상을 만든다. 석재의 특징과 장점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활용한 구조체가 바로 홍예교다.


무지개 형태의 한가운데 솟아오른 부위 돌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양측면에서 가하는 압축력이 좌우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거의 모든 홍예교가 중앙 돌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 구조를 갖는다. 즉, 한가운데 놓이는 '홍예 종석'을 기준으로 좌우 돌이 같은 숫자를 이루고, 그 결과 홍예돌 전체 개수는 홀수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승선교는 홍예돌이 짝수를 이룬다. 이유는 양측면 맨 하단의 '선단석'이 놓인 자연암반의 높이차이 때문이다. 승선교를 축조한 석공들은 애써 암반을 깨 내는 수고 대신 그대로 사용하되 홍예돌의 개수와 두께를 조절함으로써 힘의 균형을 확보했다. 덕분에 인공과 자연미가 한 몸인 듯 어우러진 비경을 얻었다. 하중의 정밀한 계산은 물론 오차 없는 처리기법이 필수인 대형 석조 공사에서 이처럼 대담하게 변칙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석공들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승선교. ('신선의 세계에 오르는 다리', 2021년 7월.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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