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봉강리 정 씨 고택 1
보성 봉강리 정 씨 고택은 조선 후기 전라남도 해안가 양반집 배치 구조의 드문 사례다. 이 집주인의 15대 조상이 처음 터를 잡았던 400여 년 전 당시에도 이 마을은 궁핍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은 인근 고흥과 장흥 반도 사이로 깊숙이 들어간 득량만 갯벌과 너른 들녘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산자락 끝에 자리 잡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갯벌의 풍족한 해산물과 넓은 들녘의 기름진 논밭이 마을의 탄탄한 경제기반이 됐을 것이다.
정 씨 고택은 마을 맨 위쪽에 위치한다. 흔히 전통마을은 산자락과 들녘이 만나는 경계선 언저리에 형성됐다. 같은 마을에서도 집 뒤에 산을 끼고 있는 집은 맨 처음 마을에 터 잡은 '입향조'였거나, 마을 내 지위가 높은 경우가 많다. 정 씨 고택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이후 전국 곳곳에 새로운 마을이 생겨났다. 전란의 아픈 상처를 피해 새 터전을 찾는 이동이었다. 정 씨 고택의 조상도 이순신을 도운 공훈으로 포상받은 기록이 전하며, 그 후손이 이 마을에 들어와 지은 것이 정 씨 고택의 안채다.
전국의 고택들은 대체로 100년 안팎의 간격으로 대대적인 중건 공사를 거치며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됐다. 정 씨 고택도 맨 처음 초가였던 안채가 중간에 기와집으로 바뀌고, 1800년대 후반에는 사랑채가 늘고, 정원을 꾸미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 집은 1800년대 중후반 당시 전국 곳곳에서 등장한 지방 부호들의 호화주택들처럼 위세를 과시하는 듯한 과한 치장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별도의 담장을 둘러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구역을 각각 분리함으로써 민가에서는 볼 수 없는 반가(양반집)의 배치 구조를 갖는다. 특히, 사당 구역이 별도로 배치된 것, 안채 앞에 '내외 담'을 두고 폐쇄적인 뒷마당을 구획해 남녀의 생활공간을 엄격히 구분한 것은 성리학과 '주자가례'를 따르던 조선시대 양반가의 생활풍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행랑채(바깥 사랑채) 구역
정 씨 고택의 배치 구조는 크게 3개의 독립 구역이 서로 연결된 모습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펼쳐지는 행랑채(바깥 사랑채)가 있는 바깥마당, 진입방향 기준 우측 별도 쪽문으로 들어가는 사랑채 구역, 그리고 사랑채를 거치지 않고 바깥마당에서 곧장 직진해서 중문을 통과하면 나오는 안채가 있는 안마당.
각각의 공간은 지세를 따라 마당의 높이가 다르고 독립된 담장으로 구획된다. 구역별 마당의 레벨이 다른 것은 경사지에 집터를 닦으면서 생긴 특징이다. 이는 한국 전통건축의 조경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기법이다. 가파른 언덕을 깎아내고 터를 닦은 산지 사찰 대부분이 이와 같고, 전국의 향교나 서원 등도 일부 예외적인 평지 건축 사례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비슷하다. 구역별로 단차를 형성하는 배치 방법은 평지 건축과 전혀 다른 공간감과 깊이를 자아낸다. 각각의 구역이 지세를 따르며 서로 다른 높이를 갖게 되면 시선의 위치에 따른 주변 경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행랑채 중간에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바깥 마당이 나오는데 여기가 첫 번째 공간이다. 행랑채가 'ㄱ'자형 건물로 바깥 사랑채로도 쓰였다고 하지만, 현재는 일자형 평면에 맞배지붕을 얹은 보통의 문간채다. 가운데 한 칸에 판문을 달아 대문으로 쓰고 좌우 칸들은 일꾼들이 사용하던 온돌방과 마구간으로 쓰였다.
경사지를 정돈해 마당을 닦았고 일부는 석축을 쌓아 계단을 내고 양 옆으로 소나무를 심었다. 이를 '화계'라 하는데, 경사지 건축에 흔히 보이는 조경 수법이다.
석축 아래에는 양편으로 각각 디딤돌을 놓고 끈을 묶을 수 있는 쇠고리를 박아놨다. 말에서 내리는 하마석과 고삐 묶는 장치로 추정된다.
외부 방문객이 남성인 경우 이 바깥마당에서 곧장 우측 사잇담 쪽문을 통해 사랑채로 진입한다. 담장에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일각문을 냈다.
안채와 내외 담
중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선을 가로막는 짧은 담장이 나타난다. '내외 담'이다. 중문이 열린 상태로 바깥마당에서 인부들이 작업하거나, 외부인들의 출입 시 시선을 가려 안마당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용도다. 자연석과 흙, 수키와를 이용해 문양을 내 꾸몄다. 일반적으로 내외 담은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설치되어 집안 여성의 불편을 최소화했다. 내외 담 안쪽 유자나무도 같은 기능을 갖는다.
시멘트 기와를 얹은 내외 담의 외형이 한식 전통기와를 이은 다른 건물들과 조화롭지 않아 보인다. 아마도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등을 정비할 당시 담장은 기존 형태 그대로 유지한 것 같다. 나는 시멘트 기와라도 꽤 오랫동안 널리 쓰였고, 당시로선 합리적 이유가 있다면 문화재로서 재료의 '진정성'(authenticity)을 인정하는 게 옳다고 본다. 시멘트 기와라고 막무가내로 철거하고 전통기와로 바꾸는 것보다는 이 내외 담처럼 그대로 두는 것도 의미 있다.
안채 건물은 일('-') 자 평면이다. 경북 산간이나 강원도의 'ㅁ'형 평면이나, 경기와 중부지방의 'ㄱ'자 꺽인집과 구별되는 온난하고 일조량이 많은 남부와 제주지방 평면의 특징이다.
부재의 규격이 크고 전체적으로 집의 짜임이 견고하다. 바깥 기둥에 원주(둥근기둥)를 사용해 변화를 줬다. 그런가 하면 이 집은 처마에 부연을 달지 않은 홑처마를 했다. 상류층 건축은 대체로 지붕 서까래 끝에 또 하나의 작은 서까래를 걸어서 처마 끝선을 연장하고 화려한 멋을 더한다. 일부러 겹처마를 피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정 씨 고택의 건축주는 홑처마선의 소박하고 단정한 멋을 얻었다.
뒤뜰
안채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건물 뒤뜰이다.
앞에서 볼 때는 단순한 일자형 집이지만 옆으로 돌아가 보면 건물 양쪽 끝 툇칸의 지붕을 뒤로 꺾어 연장했다. 일반적인 'ㄷ'자 꺽인집과 다르게 확장 길이는 매우 짧아서 기존 뒷면 툇마루에서 겨우 2자(60cm가량) 남짓으로 보인다. 석축 때문에 확장 길이에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답사 당시 나는 확장한 칸과 석축 사이가 담장과 판문으로 막혀 폐쇄된 것을 보고는 이상하다 싶어 혹시 후원이 아닌가 했었다. 집 뒤 언덕에 올라서서 그 안쪽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꺾임 부위가 단순히 방 크기를 넓히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장독대가 있고, 높은 담장과 문, 꺾임 부위 지붕으로 완전히 차단된 뒤뜰. 이곳은 여성들 전용 생활공간이자 휴식처다. 확장한 꺾임 부위 방에서 뒤뜰로 드나들 문과 이동 통로인 툇마루가 확장되어 있다. 판벽과 들창문이 있는 칸은 목욕탕으로도 쓰였을 것이다. 1800년 초에 지은 경북 안동 '번 남고택'의 안채 한 칸이 목욕탕으로 사용된 예가 있다. 보통 뒤뜰은 정지(부엌)와 바로 통하도록 하며, 뒷마당이 넓은 경우 작은 채소밭이나 화초를 심은 화단이 꾸며지기도 한다. 안채 뒷마당을 여성을 위해 꾸민 극단의 예는 궁궐 왕비의 거처인 경복궁 교태전의 뒤뜰 '아미산'이다. 왕비를 위해 인공산을 조성하고 온갖 화초를 심어 가꾼 것으로도 부족해 치장 벽돌로 굴뚝에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을 꾸몄다. 정 씨 고택의 안채 뒤뜰은 치장보다는 실용적 기능에 맞춰진 공간이다.
사당
정 씨 고택 안채의 오른쪽 뒤 공간에 별도의 단을 갖춘 작은 사당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소규모 단칸이지만 서열을 따지자면 이 집에서 제일 격이 높은 건물이다. 크고 길게 다듬은 장대석을 쌓아 너른 기단을 올린 후 건물은 짓고, 그 밑으로 다시 이중 단을 쌓았다. 양반집 사당이라도 보기 드물게 격식을 갖췄는데, 이렇게 건물이 놓인 단 바깥으로 별도의 넓은 단을 쌓은 것을 '월대'라 한다. 궁궐 정전이나 왕의 침전에 쓰였고, 종묘나 왕릉, 향교, 객사 같은 관공서에 제한적으로 나타난다. 월대는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요소다. 장대석은 가공에 품이 많이 들어가는 일종의 사치성 건축재로 조선 초기만 해도 민간에서는 사용이 엄격히 금지됐었다. 집 전체에서 과시나 사치로 여겨질 만한 치장은 거의 배제된 듯 보였는데, 민간에서 할 수 있는 최고급 건축양식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런 요소는 또 있다. 기둥 위에 가로로 꽂혀 기둥끼리 연결하는 수평방향 부재가 창방이다. 보통은 창방 위에 또 다른 수평 재인 도리가 얹혀서 서까래를 받는다. 이 집의 다른 건물에서도 창방에 도리가 곧장 포개져 있다. 그런데 사당에서는 창방과 도리 사이에 네모난 부재 조각을 띄엄띄엄 끼워서 사이를 이격 시켰다. 네모난 작은 부재를 '소로'라 하고, 소로가 쓰인 집을 '소로 수장 집'이라 부른다. 소로 수장 집은 소로가 쓰이지 않은 집에 비해 처마 부위가 꾸며지고, 조금이나마 높아져서 지붕이 한층 당당해진다. 사당 건물이 같은 방식으로 치장돼 있다.
즉, 사당 건물은 건축 의장의 관점으로 볼 때 정 씨 고택에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습을 갖췄다.
조선시대 주택에서 조상 신위를 모신 사당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지었다. 보통 안채의 동북 방향에 자리하고, 4대조까지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4대를 넘어가면 선산에서 합동 제사하는 '시제'에 포함한다. 간혹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입향조'이거나 국가에 큰 공을 세운 공신 등 왕에 의해 특별 지정되면 '불천위' 즉, 붙박이 고정 신위가 되기도 했다. 정 씨 고택 사당의 고급 격식으로 볼 때 임진왜란에서 세운 공훈으로 표창받은 조상이 불천위 신위로 지정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난번 답사 때는 직계 후손이 계시지 않아 묻지 못했는데 다음번 답사를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