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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진 Oct 18. 2020

빨간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왜 우리는 섹스하는가


필독서와 베스트셀러 목록을 절대 맹신하지 말 것.

사회학자 노명우 씨는 최근 저서 <이러다 잘될지도 몰라, 니은 서점>에서 이것을 당부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 취향에 맞는 책을 찾아 읽기도 바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바야흐로 빅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소비자의 상황과 맥락을 파악하고 니즈를 예측해 최적화된 서비스와 상품을 제공하는 시대다. 이럴진대 모두를 위한 베스트셀러 목록은 누구를 위한 독서란 말인가.


취향의 독서. 놀이하는 인간 호모루덴스에게 책은 유희다. 나 역시 언제나처럼 실용적인 사람이 되어 보려고 자기 계발서 및 재테크 서적을 잔뜩 주문하고는 한 달째 표지만 읽고 있다. 그중 하나는 다행히 목차까지는 봤다. 읽어보면 분명 모르는 얘기는 없는데 진도는 안 나가는 애매한 경험. 언뜻 보아도 인생에 득이 될 주옥같은 지침인데 도무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이상한 마음.


그런 의미에서 최근 읽은 재미있는 빨간책을 슬쩍 소개한다. 이스라엘의 탈무드, 중국의 소녀경과 함께 세계 3대 성전(性典)으로 꼽힌다는 인도의 비서 카마수트라(Kama Sutra)다. 고대 인도인들은 남성과 여성  자체로는 불완전한 존재라고 믿었다. 남녀가 결합된 상태에서만 완전한 신적 상태에 다가갈  있다고 생각했다는데 그래서인지 시바 신과 그의 아내 파르바티는 십만 년 동안 십만팔천여 개의 체위로 관계를 맺었고 그것을 카마수트라 일곱 권 중 한 권에 기록한 것이라고. 두근두근. 감출 수 없는 호기심의 도가니.


고백하건대 나의 빨간책 역사의 시작은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이다. 심지어 헤르만 헤세라니, 너무 고상하다. 그의 대표작 <데미안>과 <지와 사랑>은 미성숙한 자아가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 혹은 세속적 세계와 규율의 세계, 즉 색과 계 사이에서 고뇌하는 대표적인 성장소설이다. 또래에 비해 조숙한 편이기는 했지만 고작 열네 살의 아이가 이 거대한 인생담론을 과연 이해하고 읽었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성인이 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수도원을 나온 수도승 골드문트가 달빛 아래에서 나누었던 리제와의 첫 경험.

헤르만 헤세 <지와 사랑>

지금 읽어보니 별 것 없는 문장들인데. 그땐 금서를 읽듯 페이지를 넘기며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그렇게, 달빛이 지켜본 사랑과 함께 소녀의 빨간 책 사랑도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태도에 관하여


그리하여 그 빨간 책들의 역사를 이야기해 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러기엔 이 글에도 정해진 분량이 있으므로 바로 인도로 성전으로 넘어가 보자. 카마수트라의 카마는 쾌락. 수트라는 경전이라는 뜻이다. 저자 바츠야야나 말라는 "카마. 즉 쾌감이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을 통해, 그리고 거기에 영혼을 함께하는 마음을 통해, 적절한 대상을 상대로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오감이라니. 참으로 적절하고도 아름다운 정의다.


카마수트라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다양한 체위에 관한 설명이다. 요가를 배워본 적이 있거나 요가 자세를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아사나(요가의 체위)가 얼마나 깊고 다양한지에 우선 놀랄 것. 역시 요가의 요람 인도답게, 하 이런 게 가능해? 와 같은 화려한 기교를 가만히 읽고 있자니 오래전 인생 미드인 <그레이 아나토미> 속 주인공 세 여자의 표정이 떠올랐다.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켜준다는 이유로 포르노를 허용한 병실에서 화면 속 묘기(?)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드라마 속 한 장면.


이를 테면 '크랩 포옹' 체위 같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결합의 쾌감도와 장점, 그리고 구체적인 절차를 설명하는 식인데 독자로서 받은 인상은 놀랍게도 어떤 외설스러움이라기보단 아 이건 정성이다, 하는 관계에 임하는 태도에 관한 깨달음이었다. 자신뿐 아니라 상대 역시 절정의 쾌감을 맛볼 수 있도록 하는 배려 가득한 마음이 없고서야 쉽지 않은 일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카마수트라> 제1권에는 더 나은 성생활에 도움을 주는 64가지 일을 중시하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포도주와 같은 음료를 준비한다거나 길조와 흉조에 대한 지식을 쌓는다거나 잎사귀를 여러 모양으로 만드는 기술을 익힐 필요가 있고, 그 외에 목공예 일이나 요술, 즉흥시 낭독, 춤, 마사지, 머리 손질법 등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카마수트라에서 강조하는 대목은 키스인데, 키스는 공을 들여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것으로, 제 일의 원칙은 키스를 할 때 향긋한 냄새가 나야 한다는 것. 혹시 모를 담배 냄새가 걱정이라면 미리 구강청결제를 준비해 주시길. 역시 상대를 위한 배려가 돋보이는 원칙이다.


왜 우리는 섹스하는가


이제는 연애서의 고전이 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심리학, 철학, 사회학을 아우르는 독특한 관점으로 연애와 결혼의 본질을 풀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저서 <인생학교, 섹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는 법>에서 그는 연애와 결혼의 교집합인 섹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키스의 순간은 상대적으로 낯설었던 사람을 친밀한 이성으로 바꾸어 놓는 결정적 계기이며 외로움의 극복을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다. 나아가 현대인에게 섹스란 무언가를 잘하건 못하건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유아기 때 그랬듯 몸을 매개로 사랑받고 싶은 욕구, 혹은 자신의 살 냄새로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싶은 욕구의 발로이며, 이 모든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로 인해 이상주의적 열망에 사로잡혀 같이 자고 싶은 누군가를 찾게 되는 것, 이라고 덧붙인다. 과연 인간의 원초적 불안의 본질을 파악한 사랑 해부학의 대가다운 분석이다.


사랑이나 불안과 같은 추상적 대상에 대한 학문적이고 분석적인 접근은 잠시 그 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그것을 이성적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이를테면 자위를 한 뒤에 공허하고 외로운 느낌이 뒤따르는 이유는 쾌감에서 상호성이 지독히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외로움의 극복이라는 섹스의 진정한 목적을 배반하는 셈이라는 설명에서는 그저 아, 하고 설득당할 수밖에 없는 논리력마저 갖추고 있는 것.


그러나 일반적인 성인 여성의 관점에서, 어떻게 하면 더 다양한 체위로 즐거운 섹스를 나눌 수 있는가, 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주제는 아니다. 카마수트라를 비롯한 동서고금의 성 지침서는 육체적인 영역에서의 성행위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대다수가 위로받고 싶어 하는 걱정거리는 섹스와 현실의 접점에 있다. 예를 들면 뜸해지는 횟수. 하지 않는다고 해서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당연한 말이지만, 섹스는 일종의 애정 확인 의식이라는 생각을 가진 누군가에게 그런 설명은 변명일 뿐이다.


대체로 성욕이란 흥분의 기대심리로부터 생겨난다. 알랭 드 보통은 성욕이란 옷을 벗고 침대에 같이 누운 부부에게는 일어나지 않지만, 반대로 두꺼운 스키복에 장갑과 모자로 몸을 꽁꽁 가린 채 리프트를 타고 산비탈을 오르는 연애 초기의 커플에게서는 일어날 수 있는 것, 이라고 적었다. 어딘가 슬프지만 또한 공감되는 예시다.


일반적으로 섹스를 잘하기 위해 요구되는 자질은 대다수의 일상적인 활동에 필요한 자질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전자는 자유로움, 상상력, 유희, 통제력 상실이 중요한 반면 후자는 시간 관리와 자제력, 권위와 절차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파민이 분비되는 길어야 3년이라는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나고 나면 그 관계의 결 역시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의 침체기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해결책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생각해보니 결국 앞서 육체적 영역만을 다루었다 치부했던 인도의 성전 카마수트라에 있었다는 것.


짐작한 대로, 정답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정성이다. 너무 뻔한 답이라 실망인가. 매일 변함없는 상대, 매일 변함없는 침대, 게다가 매일 변함없는 체위라면? 역시 카마수트라가 비서라 칭송받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기혼이라면, 이제부터 몇십 년 간 같은 사람과 해야 한다는 혼인서약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카마수트라 일독을 권한다. 미혼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많이 읽고 많이 경험하시길. 인도 신 시바조차 아내와의 친밀감을 유지하기 위해 십만팔천여 개의 체위를 개발하고 행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역시 신은 위대하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이 장황한 설명의 끝을 어떻게 맺어야 하는가 잠시 고민했다. 우선 기혼 여성으로서 앞으로의 결혼 생활 또한 평화롭게 유지하고 싶은 생활인이므로 이 글의 어떤 부분도 본인의 사생활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밝히는 바이다. (아무래도 전혀 영향이 없다고 하긴 어렵겠지만.)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를 쓴 고미숙 작가는 세상에는 사랑을 나눌 수 없을 만큼 나약한 존재도 없고, 사랑이 필요 없을 만큼 강한 존재 또한 없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내 인생의 화두를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언제나 사랑이다. 생애에서 가장 열렬한 사건인 사랑과 연애, 나아가 관계를 잘 지속하기 위해서 노력과 기술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알랭 드 보통이 그의 또 다른 저서 <사랑의 기초>에서 역설했듯,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결혼해서 잘 사는 법을 굳이 배우지 않아도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활동 영역에서의 교육과 훈련에 열성적이면서 유독 사랑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 없이 직관으로 그 비결을 터득하길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다시, 카마수트라의 일독인 것인가.

기승전 기술.


나의 비루한 글이 누군가의 유희적 독서 혹은 즐거운 성생활에 미약하나마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덧붙여 지루한 일상 속 한줄기 빛과 같았던, 그리고 웬만한 빨간책은 섭렵했다고 자부했던 문학소녀를 겸손하게 한 <카마수트라>, 운명적 만남을 있게 한 밝은 달이 지던 어느 새벽과 언제나 나를 성찰하게 하는 그, 그리고 늘 슈거프리 한 인생 교훈을 선사하시는 나의 영원한 스승 알랭 드 보통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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