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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한 책생활 Dec 28. 2020

시계가 깨졌다

아버지 기일 전 날, 책 읽는 아이를 보며

 아침부터 괜히 안 하던 청소를 한다고 소란을 피우다 벽시계가 떨어져 깨졌다. 핑계 김에 유모차를 끌고 이케아로 나섰다.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매장은 마스크를 쓴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휴일 오후 외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특별한 목적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미로 같은 매대를 한 바퀴 돌았지만 적당한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아이도 잠들어 천천히 둘러보려는데 불현듯 내일이 아버지 기일인 게 떠올랐다. 마치 아, 오늘이 벌써 금요일이던가, 와 같은 일상적인 망각과 기억.



아이들은 외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꽤 오래전 일인데도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처럼 누구도 쉽게 꺼내지 않는 이야기다. 한 번은 남편이 남매를 보며 ‘장인어른 계셨으면 진짜 예뻐하셨을 것’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순간 그런 생각을 해준 남편이 고맙기도 하고 외할아버지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이 아쉽기도 하고 더 이상 아빠를 볼 수 없는 내가 슬프기도 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우리 집은 굴곡이 있기는 했지만 나름 <데미안>에서 그려지는 ‘선의 세계’와 같이 안온한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결혼 안 할 거야, 와 같은 생각은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비교적 이른 결혼을 한 편이지만 아빠는 한 번도 나에게 ‘출산과 육아를 하는 여자의 삶’을 전제로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여차저차 영문과를 가게 되었을 때도 일을 하려면 경영학을 배워야 한다고 권유했던 것도, 패션 MD를 하겠다고 설치며 압구정으로 출퇴근할 때도 인맥을 쌓아 사업을 시작해 보면 좋겠다고 했던 것도 아빠다. 당신과 많이 닮았던 나를 유난히 사랑했고, 늘 자랑스러워했다. 어쩌면 내 안의 의존적인 성향 덕분에 갑자기 방향을 잃고 결혼을 선택한 나를 내심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고 늘 생각했고, 죄송했다.

대체로 무난했던 만큼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었던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삶을 살았고 그저 방황하던 어린 날 속수무책으로 아빠를 보내드려야 했다. 영정 사진을 준비할 틈도 없어 상복을 펄럭거리며 택시를 잡던 황망한 기억. 나의 아쉬움과 죄송함은 그 겨울 이후로 계속되었다.

이야기된 아픔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고 했다. 아빠 이야기는 이미 치유될 만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케아에 마음에 드는 시계가 없는 바람에 계속 눈물이 났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유모차를 끌며 우는 아줌마를 보고 정상이라 생각할 사람은 없었을 테니 다행이다.


두 돌쯤 되면 그림을 보고 문장을 기억하기도 하는 것 같다. 집에 돌아오니 딸아이가 아빠와 책을 보고 있었다. 혼자 앉아 그림책을 앞에 두고 홍알홍알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나의 아버지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싶었다. 꼭 무엇이 되지 않아도, 훌륭한 누군가가 되지 않아도, 그저 내 딸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조건 예쁘고 무조건 대견하고 무조건 자랑스러웠으리라, 생각하니 더 이상 아빠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아빠는 내가 어떤 삶을 살든 나를 응원했을 것이다. 아이에 대한 내 마음이 그렇듯.

지난 추석 수목장에 다녀오면서 네 살 아들에게 외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 계신다고 말해주었다. 아이가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하늘나라가 어디냐고 묻기에 좀 멀다고 했다. 아니 가깝다고 할걸, 아니 그냥 마음 속이라고 말해줄 걸 그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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