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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한 책생활 Oct 13. 2020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원인을 찾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문장과 연애 중이다. 하루 종일 문장을 떠올리고 단어를 고르다 그 조각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을 새벽을 기다린다. 퇴근과 동시에 아이 둘을 픽업해 겨우 저녁을 챙기고 씻겨 재우면 열한 시. 키즈노트 알림장을 열어 혹시 빠진 것은 없는지 체크하고 내일 입힐 아이 옷을 주섬주섬 고른 후 노트북을 켜면 어김없이 잠이 쏟아진다. 그저 마음만 앞서다 제풀에 지치는 그저 그런 나날의 연속.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를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 아홉 가지를 해야 한다. 그리스 신탁의 저주인가 싶은 이 말을 매일 실감하는 요즘이다.

자신을 패션 MD라 소개한 <옷 읽는 남자>의 매력 넘치는 브런치 글을 읽다 이십 대에 이루지 못했던 내 꿈을 생각했다. 그렇다. 나도 패션 MD가 꿈이었던 적이 있었다. 이 아줌마가 또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누구나 꿈꾸던 20대의 추억 정도는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십여 년 전 압구정 갤러리아 명품관에서 편집매장 엠디를 꿈꾸며 인턴을 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이 얘긴 차차 하기로 하고.

퇴근길 단골 반찬가게 앞에서 잠깐 차를 세웠다. 저녁 반찬을 고르려다 말고 이 엠디 얘기가 하고 싶어져 지난여름 딸아이 원피스 피드에 올렸던 짧은 글 제목 <원피스에 대한 단상>을 검색했는데 이게 웬걸. 같은 피드가 두 개인 것이 아닌가. 분명 내 계정 일리 없는 외계의 것이 마치 내 행세를 하며 버젓이 팔로워를 늘리고 있었다. 내 아이들의 얼굴까지 도용해서.

무엇이 잘못된 걸까. 인스타그램에 일상을 공유하며 지나치게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도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했는데. 심지어 최근엔 자신의 삶을 정의하려면 SNS를 시작하라는 뜬금없는 결론의 글도 썼는데. 그저 나이브했던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계정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심심하다는 아이들을 달래며 차근차근 신고 절차를 밟았다. 신분증과 함께 본인임을 증명하라기에 멍한 표정으로 셀카를 찍고 있는데 네 살 꼬마가 꼬깃한 사진 하나를 들고 왔다.

엄마랑 아빠는 있는데 자기랑 동생은 없다며.
젊은 남녀가 이어폰을 나눠 끼고 수줍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십 년 전 늦은 가을. 우리가 사랑했던 어린 날. 무려 연애시절의 스냅사진을 너는 대체 어디서 찾은 거냐. 그런데 이게 아직도 엄마로 보이니. 고마워. 아이를 꽉 안았다. (이십 대의 엄마를 알아봐 줘서 안은 것은 아니고.)


영문도 모르고 그저 폭 안기는 네 살 꼬마를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체 이게 뭐라고 마음이 심란해져 하루 종일 떨어졌다 만난 애들을 또 방치해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봇인지 사람인지 모를 해괴한 계정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나를 또 이렇게 성찰하게 만드는 것인가.


아직 얘기 안 끝났으니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서. 나 참 예뻤구나. 다들 내 맘 같은 줄 알았던 참 말랑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십 년의 세월. 뒤통수도 몇 번 맞아보고 떼도 좀 써보고 엉엉 울기도 하며 버텼더니 어느새 닳고 닳은 서른 중반의 애엄마가 사칭범 신고를 하겠다고 신분증을 들고 씩씩거리며 앉아있는 것. ‘어느새’ 에는 어떤 값싼 자기도취와 그 안에 오래 머물고 싶은 달콤한 유혹이 있다, 고 #김영하 작가가 그랬던가. 정말 그랬다. 어느새.


앞으로 겪을 일이 더 많아, 라면 할 말은 없지만 나름 산전수전 겪고 나니 어느새 웬만한 일에는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짧아진 머리 길이와 깊어진 눈가 주름과 함께 나도 단단해졌다.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 하지 않는가. 여자가 왜 약해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만. 그러나 스테이지 클리어와 동시에 다음 스테이지가 기다리는 것이 인생인 것. 엄마라는 관문은 처음이라 내 아이의 신상에 영향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또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넷플릭스 미드 <워킹맘 다이어리>의 첫 에피소드 마지막 부분에 무척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주연인 #캐서린 라이트만 이 아이 유모차를 밀며 숲 속을 조깅하다 곰을 만나는데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다 곰 앞에 정면으로 돌진해 마치 동물처럼 포효하는 씬. 크앙 싸우자. 이게 또 엄청 웃긴 장면인데 출산 후 호르몬이 날뛰던 그 시절의 나는 동물적 모성애란 이런 것인가 하며 울컥해 아이를 재우고 새벽에 혼자 보다 웃다 울었다는 웃픈 이야기.



하. 그래서 신고는 마무리가 되었지만 내 착잡한 마음은 언제 마무리될 것인가. 어디서부터였을까.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것일까. 보통 문제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원인을 찾게 마련이다. 하지만 경험 상 그 원인을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찾는다고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운이 나빴던 것. 조심해서 나쁠 것 없고 필요한 정비 역시 해야겠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일이 발생한 건 내 탓도 아니고 내가 혹시 저질렀을 지난날의 사소한 잘못들에 대한 대가는 더더욱 아닌 것을. 이 글을 읽는 어른들은 다 알만한 사실. 우리네 삶은 권선징악이 아니다. 멘탈 갑이 장땡. 하여 쪼렙 엄마인 나는 한번 더 내 아이를 더 건드리면 가만 안 두겠다는 전투력 만렙의 타오르는 기세를 이제는 가라앉혀야 하는 것. 허나 기세의 불길이 너무 뜨거워 오늘은 아무래도 쉽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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