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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한 책생활 Feb 16. 2023

사랑과 이해

언제 사랑을 느끼시나요

『알쓸인잡』이 종영했다. 매번 챙겨보진 못했지만 언젠가 ‘사랑’에 관해 다룬 적이 있었다. 인간은 언제, 누구에게 사랑을 느끼는가. 심채경 박사가 알랭 드 보통을 언급하며 “사랑을 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운을 뗐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사실은 사랑을 사랑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


영미 단편 소설집 『사랑의 책』에 실린 모파상의 <달빛> 마지막 문장이다. 이 대목에 설마 나도..? 하며 스스로를 돌아본 적은 있으나 ‘사랑에 빠진 나’를 사랑한 적은 아무래도 없었던 것 같다. 외려 사랑에 빠지면 스스로가 작아 보이지 않나. 나긋하고 확신 있는 심채경 박사의 태도는 과한 자기애적 발언도 누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높은 자존감’으로 느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멀리 서는 ‘매력’이, 가까이에서는 ‘신뢰’가 사랑의 기준이라던 김영하 작가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김상욱 교수도 “결혼은 상대에게 예측가능성을 주는 것”이라는 백영옥 소설가의 문장을 인용하며 논리에 힘을 실었다. 설렘과 안정감은 양립하긴 어렵지. 동의는 한다. 그런데 매력과 신뢰는? 사랑의 설렘이 무지 덕분이라면 좀 가혹하지 않은가. 빛나는 미지의 대상에 신비감을 느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어쩐지 아쉽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은 호기심보다 안정감이지만, 새로운 매력을 보이려는 정성도 사랑이겠다. 설렘은 귀하고 아름다운 감정이니까.




지난주 인스타그램에 매튜 매커너히의 『그린라이트』 리뷰를 적은 후 아웃사이트 출판사에서 디엠을 받았다. 좋은 리뷰 감사하다는 평범한 인사였는데, 그 안에 흔하지 않은 구절이 있었다. “000님도 이 책의 판권을 왜 샀는지 ‘이해받은’ 느낌이라 리뷰를 읽고 뭉클하셨다고 합니다.”


굳이 사생활을 적은 이유는, 그 짧은 대화가 오간 후 ‘이해받는 느낌’에 대해 오래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해받는 느낌과 사랑의 관계를, “당신을 이해합니다”, 하는 말의 무게를. 어쩌면 나를 이해할지도 몰라. 그 보이지 않는 기대 안에서 서로는 특별해진다. 모든 창작의 바탕에도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거대한 자기 합리화일지언정 내가 읽고 쓰는 일조차 말이다.


알쓸인잡의 질문으로 돌아가, 인간은 언제 누구에게 사랑을 느끼는가. 진부하지만 나에게 사랑의 시작은 공감과 이해다. 이해한다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미지의 대상을 온전히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읽고 쓰고 생각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래서다. 같은 마음일 누군가를 떠올리며, 이해받기를 바라기보다 더 헤아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적었다. 문장을 다 살아낼 수 없겠지만 적고 나니 조금 더 사랑에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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