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의 종지부는 타이밍
"아직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그 해의 가을날, 연인도 친구도 아니었던 어중간했던 관계를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시작했던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나에게 아내가 알 수 없는 미소로 나에게 신신당부했던 말이다.
장거리 연애가 으레 그렇듯이, 짧지만 압축적으로 시간을 함께하고 난 후의 후폭풍은 그 여운이 잠시 길다. 마치 이미 결혼한 신혼부부처럼 24시간을 이미 함께 보내고 온 후 또다시 몇 개월을 다시 만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피 끓는 청춘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다.
그렇다고 매일 달력만 넘기는 삶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각자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며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갖고 하루를 무사히 또 넘겨낸 뒤, 통화만은 그래도 할 수 있으니 매일 밤 8시-9시 사이에 서로의 하루를 미주알고주알 털어내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나마 중국과 시차가 1시간뿐이라는 건 다행인 일이었고.
그런 날을 계속 이어가다 아내의 생일 즈음엔 또 한 번 베이징을 깜짝 방문하여 또 하나의 추억을 어딘가에 새겨두기도 했다. 방문한 지 두 달도 채 되기 전의 일이라 생일에는 안 와도 손사래 치던 아내였지만 베이징이 뭐 유럽이나 미국도 아니고, 비자만 있으면 세 시간 내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어찌 그리 가성비를 따지겠나.
그러다 새해가 되어 아내가 중국에 간 지도 근 반년이 되어갈 무렵, 첫 번째 유치원에서 교육과정과 선생님들 간의 문제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던 아내는 다행히도 좀 더 규모가 크고, 깨끗한 유치원으로 옮길 수 있어 차오양구를 떠나 좀 더 서쪽으로 집과 유치원을 옮겼다. 당시 영상통화로 점점 표정이 좋아지는 모습을 보고,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듣는 것밖에 할 수 없던 나의 마음도 점점 놓였다.
그러나 본래 일이 안 풀리려면 지독히도 정상적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법이다. 두 번째 유치원은 제공해 주는 집도 깨끗하고, 커리큘럼도 더 체계적이어서 아내가 굉장히 만족스러워했지만 문제는 비자였다. 당시 비자기간이 거의 다 되어가던 아내에게 규정에 일부 변경이 생기면서, 아내는 갑자기 우크라이나 본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새로 비자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아내가 다시 돌아간다고 해서 비자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는, 전망이 꽤 어두운 상태였다. 나는 아내가 계속해서 일하고 싶어 하는 걸 알았기 때문에 다른 근처 나라에서 해결할 수는 없냐고, 그 정도는 내가 부담할 수 있다고 했지만, 아내는 나에게 부담을 지울 수 없다고 일단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에이전시와 얘기해서 상황을 보겠다고 했다. 비자가 안 나올 수도 있지만, 약간의 향수도 있던 아내는 그때 조금 체념했던 것 같이 보였다.
새해를 그렇게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로 보내는 와중에, 중국과 한국 모두에게 큰 명절인 구정이 다가왔고, 아내는 구정 전에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것으로 일정이 잡혔다. 혼자 보낼 수 없던 나는 일주일 휴가를 내고 다시 베이징으로 향했고, 아내가 마지막 정리를 잘할 수 있도록 손을 보태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아내가 베이징을 떠나기 이틀 전 우리는 야경이 멋지다고 하던 스차하이로 저녁 산책을 나섰다. 한자로 '십찰해', 열 개의 사찰이 있던 호수라는 뜻의 그곳은 비록 이제는 하나의 사찰만 남았지만 강물을 따라 비치던 건물들의 야경이 제법 낭만적인 장소였다. 귀국을 얼마 앞두지 않은 아내의 마음은 기쁘면서도 아쉬운, 복잡한 심경을 띠고 있었다.
한참을 물을 따라 걷고 있던 때에, 나는 아내의 잡은 손을 코트 주머니 안으로 넣고 계속 따라 걸으며 말했다.
"우크라이나에 돌아가도, 다음엔 중국으로 오지 말고 한국으로 와."
아내는 그렇게 말하는 나를 보며 지금 청혼이라도 하는 거냐며 장난치는 말투로 나에게 기댔지만, 나는 계속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청혼 맞아, 멀리 떨어져 만나는 것도 힘들고, 너 아닌 다른 사람도 이제 생각을 못 하겠어. 마음이 있는데 시간을 재고 싶지 않아. 너 하나면 된 거야.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우리가 같이 하면서."
그러면서 나는 아내에게, 언제나 기회가 되면 줄 거라고 생각했던 내 나름의 약혼반지를 품에서 꺼내 왼쪽 약지에 끼워주었다. 계획한 거냐고 물으면, 나는 아내를 만난 이후로 언제나 때를 기다리며 반지를 갖고 있었다.
나의 갑작스러운, 그러나 예측 가능한 청혼을 받은 아내의 표정은 처음 나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했던 그날처럼 오묘했다. 그러나 그때보다 더 확신에 찬 두 눈으로 나를 보며, 반짝이는 풍선을 품에 안은 채로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물 위에서 그렇게, 우리는 장거리 연인에서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다.
벌써 이 이야기가 8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아내가 베이징에 있던 기간은 채 8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리고 내가 중국을 사람이 많아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아내에게 베이징은 언제나 즐거웠던 기쁨의 추억이 넘치는 곳이다.
딸아이가 예전 사진을 보여달라고 조를 때 이따금씩 보게 되는 베이징 사진을 볼 때마다, 아내는 요즘에도 때때로 언젠가 둘째까지 좀 더 크면 그때는 꼭 다시 베이징에 가 보자고 조른다. 아마 그것은 우리가 가장 찬란했던 서로의 청춘을 새겨두었던 잊을 수 없는 장소이기 때문에, 많이 변한 우리의 양손에 딸을 붙잡고 그때를 추억하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비자 문제는 있지만, 나 또한 옛 사진을 보며 때때로 불타올랐던 내 열정을 추억한다. 그때가 캠프파이어였다면 지금은 모닥불 정도로 활활 타지는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쉬이 꺼지지는 않는 열정의 농도는 그대로지 않을까. 우리는 언젠가 그곳을 다시 방문할 것이다. 우리가 약속을 남긴 그 장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