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올해도 미래의 전망이 어둡습니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우리 회사는 내년 사업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도전적인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직장인이라면, 옛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나 어느 회사든 다를 바 없는 대표이사님의 말씀을 연초, 연중, 연말에 듣게 된다. 말하는 스타일은 사람의 성격이니 조금씩 다르겠지만 논조는 똑같다. '우리 지금 어렵다. 아껴 쓰고 많이 팔자'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내가 처음 회사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 본인께서 회사를 다니시던 80년대 중반에도, 대한민국은 단 한 해도 '올해 기대됩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 나라니 그저 너는 네 자리에서 열심히만 하라고.
아버지 말씀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된 날도 벌써 오래전, 이제 어느덧 차부장급으로 성장한 아들은 매년 돌아오는 사업계획 수립 시즌마다 그 말의 깊이를 더욱 통감하며 지내고 있다. 사업계획의 숫자를 풀어내는 재무회계팀 입장에서, 나는 매년 그 보고서 안 수치에 담긴 부서들의 동상이몽을 바라보며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하는 현타에 빠질 때가 있다.
회사마다 디테일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사업의 본질은 '회사가 만드는 제품/서비스를 팔아 이윤을 남기는 것'이라는 걸 감안하면, 보통의 사업계획은 아래의 수순을 따르게 될 것이다.
1. 회사 주력상품에 대한 내년도 수요 예측
2. 수요 예측에 따른 내년도 제품 생산 및 공급계획 수립
3. 그에 따른 유지보수 또는 추가 투자비 예산수립
이 과정에서 판매에 대한 마케팅 팀의 브랜드 전략이 나오기도 하고, 각 부서에서 인원할당 요청에 대한 치열한 국지전이 오가기도 한다. 사업계획과 별개로 인원에 대한 역량강화 방안을 수립해 오라는 동떨어진 명령이 하달될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큰 줄기는 저 세 가지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모든 행위를 매출액, 매출원가, 판매관리비로 집계하여 주어진 내용에 따라 처음 손익을 내면 제일 먼저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분명 내년 계획인데, 올해보다 훨씬 못하는 수치가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매출 수요는 증가하는데 이런저런 비용을 넣으면 올해 전망치보다 택도 없는 숫자가 나오고, 자연스럽게 답이 없는 '대책회의'를 수립하게 된다.
대책회의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내년에 내가 얼마나 안전하게 내 목표를 수립하여 1년 동안 압박을 크게 받지 않겠다는 각 부서들의 숨김패를 반이라도 까기 위한 회의에 가깝다.
수량은 10% 올려놓고 판매단가를 5% 인하해야 한다는 영업부서에 질문을 던지면, 경쟁사들의 가격경쟁 압박이 심화되어 가격인하 없이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수치라고 말을 한다. 현장을 모른다는 푸념, 그럼 가서 팔아보시든가 하는 말 정도만 나와도 꽤 얌전하게 마무리되는 편이다.
협력사의 단가인상 요청을 막을 수 없으니 내년도 일부 품목 구매단가를 올려야 한다는 구매팀의 말에, 원가 인상분만큼 판매가격에 일부 녹일 수 있냐 물어보니 영업은 손사래를 친다. 그러고서 구매팀씩이나 돼서 협력사 단가관리 하나 못하냐고, 우리 갑은 우리 회사 단가를 갖고 노는데 하는 제 발에 침 뱉는 언쟁이 벌어진다.
그러다 슬쩍 공장에선, 몇십 억짜리 투자계획서를 내밀며 공장 설비가 많이 낡았고, 로봇기술을 도입하면 효율이 더 난다며 비용 투입을 요청한다. 설비투자를 진행하면 인력감축이 일어나냐 하니 그건 아니라고 하며 '그럼 공장 세울 거야?' 하는 표정을 지으시며 앉으시는 일은 굉장히 흔하다.
텍스트로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이 모든 논쟁의 목적은 내 행위에 대한 비용을 정당화하고, 내년 나의 목표를 조금이라도 달성하기 용이한 목표로 끌어내리기 위함으로 수렴된다. 같은 회사를 다니지만, 서로에게 내년의 꿈은 달리 가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그나마 사업계획 수립에 괜찮은 핑계들이 몇 가지 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원재료 가격 안정화에 문제가 있고, 트럼프 행정부의 예측 불가능한 관세선포로 수요와 공급 모든 부분에 제동이 걸렸다.
물론 현재보다 못한 미래를 그릴 수는 없기에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다른 꿈을 최대한 비슷하게나마 바꿔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매년 어렵다는 프레임 안에 숫자 싸움을 해 나가는 현실 안에서 아마 그래서 내가 해가 갈수록 점점 인류애가 떨어지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계획 안에 있는 숫자들은, 변명거리가 아닌 그 사업을 실행해야 하는 현업의 살아남기 위한 생존 기술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부서인 나로서는 이를 나 스스로 흔들고 결정하려 하기보다는 묵묵히 이야기를 주섬주섬 모아 놓아 지키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중심 속에서 변명이어도, 올바른 방향으로 조타가 잡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