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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더 이상 출장이 설레지 않는다

설레는 이상과 달리 냉정하게 떨어지는 현실

by Karel Jo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 직장 드라마나 소설, 영화 같은 매체에서 나오는 출장을 보면, 언젠가 나도 저런 회사원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막연히 동경했던 기억이 난다. 꼭, 전 세계를 마음껏 누비며 일하는 멋진 회사원이 되겠다는 흑역사 넘치는 다짐도 했었다.


보통 출장이라고 하면 그려지는 광경은, 우리가 누구나 알 법한 뉴욕이나 런던, 도쿄 같은 해외 대도시에 비즈니스석을 타고 도착지에 내려, 치열한 회의 끝에 호텔 침대에 잠시 쓰러져 눕다 옥상의 루프탑 라운지에서 칵테일 한 잔을 혼자 마시며 그날의 소회에 잠시 잠기다 우연찮게 로맨스가 끼어들기도 한다.


이런 판타지를 보고 자란 나에게 첫 출장 명령이 내려진 순간은 한껏 나를 부풀어 오르게 했다. 당시 슬로바키아 지사 재무팀원들이 대부분 일괄 퇴사하며 조직 붕괴 직전에 이르게 되자 정황을 아는 내가 긴급투입되기로 결정되었다. 재무회계에서 출장 갈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기대감을 안고 출장지로 떠났다.


물론,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영화는 영화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떠난 첫 슬로바키아 출장길은 나에게 냉혹한 현실만 안겨주며, 출장이란 직장인의 리프레시가 아닌 내 돈 안 써서 다행인 24시간 근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현실적인 출장의 모습이라 하면, 임원들도 언감생심 잘 타지 못하는 비즈니스는 그림의 떡으로 놓고 이코노미 옆자리에 사람이라도 많이 안 타면 다행이다. 분명 비수기 평일인데도 어쩜 비행기에 그리 사람이 많은지 갑갑한 공간에서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을 마치고 도착지에 내리면, 이미 지친 몸에 귀국을 꿈꾸게 된다.


호텔도 흔히 아는 5성급 브랜드를 꿈꿀 수 없으니, 그나마 비즈니스 4성급이라도 지원해 준다면 좋은 회사를 다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행히 외국계 회사는 숙소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편이라 나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주변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방 지원이 그리 훌륭하지 못한 경우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항공과 숙박은 이동에 관련된 문제고 출장을 가장 꺼리게 만드는 제1의 원인은 '업무'일 것이다.


보통 외유성 출장이나, 컨퍼런스를 참석하는 게 아닌 이상에서 출장은 그 분명한 '목적성'을 갖고 가게 된다. 고객사와의 중요한 미팅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든지, 내부 회의에서 통화로 보완될 수 없는 점을 대면을 통해 최종적으로 확정한다든지 등, 출장지에서의 업무는 굉장히 바쁘게, 그리고 압축적으로 이뤄지게 마련이다.


'지금은 출장 중'이라는 메시지를 보고 본국에서 연락을 안 하면 다행이겠지만, 사실 그럴 리 없다. 특히나 출장자가 결재권자라면 더더욱이나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연락을 받게 된다. 대결을 지정해 놓고 갈 수도 있겠지만, 통상 출장이 3일 정도 걸린다는 걸 생각하면, 편의상 지정 안 해놓고 가는 경우가 더 많으니 연락은 필연적이다.


그나마 같은 대륙권역이면 모르겠지만, 대륙을 건너뛰어 시차가 발생하게 되면 더욱 암담해지면서, 24시간 콜센터가 되어 업무를 보게 된다. 현지 시각으로 낮에는 출장지 업무를, 밤이 되면 밤낮이 뒤바뀐 원래 직장에서 오는 회의와 연락, 승인요청, 그리고 업무 질문을 쳐내면서 시차적응도 안된 몸을 혹사시키는 게 현실의 출장이다.




그렇게 한 번 출장을 겪고 나니, 나는 두 번 다시 출장을 가고 싶지 않아 졌다. 물론 출장이라는 게 나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니 회사가 가라고 하면 가는 거였지만, 출장 일정이 잡히면 어떻게든 하루라도 일정을 줄여 보려고 출장지 일정을 수강신청 못지않게 고민하며 알차게 채우려고 애를 쓰고 있다.


딱 한번, 그 당시 회사가 잘 나갈 때 전 세계의 재무회계 원가담당이 모여 원가 컨퍼런스를 연다고 출장이 잡힌 적이 있었다. 그때의 출장이 그나마 미디어에 나오는 출장 현실과 비슷한 느낌이었고, 그런 출장이라면 1달에 1번씩 가라고 해도 갈 것 같았다. 아쉽게도 아마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출장을 너무 악독하게 그린 것 같지만, 출장이 주는 순기능도 분명히 있다. 서로 영상이나 목소리로만 통화하다가 실제로 대면하게 되면서 대면의 힘이 주는 친목 향상과 이해도 증진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동료를 하나로 묶어주는 가장 강력한 방법임에 틀림없다.


오늘도 새로 채용한 직원을 소개하기 위해, 다행히 해외가 아닌 국내출장으로 KTX에 몸을 싣고 출장을 떠난다. 아쉽게도(?) 1박 일정이라 내일 다시 돌아와야겠지만, 이제는 출장에 대한 환상도 그 무엇도 없이 영혼 없이 가방에 짐을 구겨 넣고 대충 떠나지만, 이 출장을 돌아오는 순간은 보람찼다고 느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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