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타보다 빠른 주말을 보내고, 출근길 관성의 힘으로
두어 달 전, 역삼동 사무실에서 지금의 여의도 사무실로 오피스 이전을 앞두고 낡은 서류들을 파쇄인지, 보관인지 등을 분류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사무살 이전의 중노동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 말하자 팀원 중 한 명이, 문득 서류뭉치를 박스에 집어넣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팀장님의 좋은 글감이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데뷔곡이 될 뻔한 치타보다 빠른 주말"
여자친구면 그래도 내가 '아 누구다'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걸그룹이었지만 노래 제목은 도저히 그들의 유명곡들과 맞지 않는 제목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나에게 그 팀원은 손에 든 서류들을 잠시 내려놓고는 유튜브 영상 한 개를 보여주었다.
영상을 끝까지 다 보고 나는 나지막이 한 마디 던졌다.
"뭔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데뷔곡이었으면 지금의 얘네는 없었겠네"
주말이 짧다, 주말이 총알처럼 흘러가 버렸다는 말은 직장인, 아니 어쩌면 학생일 때부터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일 것이다. 학생일 때 아직 주 5일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토요일 오전에 학교에 나와 주말을 낭비했고, 대학교에 가서 토요일 수업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몹시 감격했다.
그러다 처음 회사일을 시작하면서 배움이 아닌 내가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내야만 했던 사회인으로서의 평일을 보내 보니, 새삼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며 이렇게 생각했다.
'대체 은퇴할 때까지 이걸 어떻게 매일 반복하며 할 수 있는 거지?'
이런저런 불평을 달고 살고, 아득히 먼 미래를 채 그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로 평일에 퇴근해 봐야 다음날 출근을 위해 별 일 없이 바로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억울함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결혼 전에는 주말에 어떻게든 일찍 일어나서 쉬는 날의 여유로움을 찾기 위해 뭐라도 하려고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렇게 무리해서 뭔가를 하고 돌아온 날에는 더 피곤한 몸을 이끌며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사람의 보상심리란 그렇게 간단하고 논리적인 이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주말이 짧은 건 사실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월화수목금의 5일과 토일의 2일은 단순한 비교로도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 '주말이 짧은 이유는 실제로 짧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은 어처구니없이 들리지만, 그 이상의 맞는 설명을 찾을 수는 없다. 그나마 최근 논의되는 주 4일제가 만약에라도 정착된다면, 그때는 밸런스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리를 오늘 이 시간에도 출근길로 이끄는 것은 '출근길의 관성'에 물든 훌륭한 삶에 대한 자세가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일요일 시계가 점심을 지나 저녁으로 흘러갈수록, 내일부터 다시 5일을 어떻게 버티지 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하려다 어떤 것도 끝마치지 못하고 밤잠을 설치며 일어난 월요일 아침, 관성이 없다면 우리의 몸은 현관문 밖으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둘이나 있고 나니 평일보다 주말이 더 피곤한 날도 많아졌다. 평일 내내 아빠를 보지 못한 딸들의 부름을 차마 외면할 수 없는 것이 또 아버지라는 이름이기에 열과 성을 다해 놀아준 뒤 나도 모르게 일요일 늦잠을 자다가 딸들이 깨워 일어나는 일은 이제 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6월의 첫 시작, 어느 날의 월요일 아침에, 그렇게 출근길 관성에 이끌려 나는 또다시 버스 위에 몸을 올려놓고 사무실로 향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누구도 칭찬해 줄 일이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으며 모두가 해내고 있는 일이지만 그 무명의 용기를 나는 오늘 모두에게 칭찬해주려고 한다.
짧은 주말을 보내고 또다시 긴 평일을 맞이하러 가는 훌륭한 우리 모두들 앞에, 그 길의 끝이 또 다른 달콤한 주말이기를 바라며 오늘도 그렇게 어느 월요일의 한 자락을 열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