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깊이는 시간의 길이로 정해지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던 격동의 시기를 겪던 지금 회사의 재무실은, 그래도 작년부터는 꽤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중이었다. 일단, 같은 임원으로 1년 이상을 했고 밑의 구성원의 변화도 거의 없었던 시기였기에, 우리는 이제야 한 사이클 이상을 돌려볼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큰 기대는 큰 실망으로 다가온다는 진리의 그 옛말처럼, 우리는 이제 곧 한 명의 팀장과 한 명의 신입 팀원의 퇴사를 앞두고 있다. Commercial Finance팀의 팀장으로서, 나 또한 남은 사람들의 사기를 꺾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그들의 마음을 추스르는 데 온 힘을 다 하고 있다.
회자정리,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도 있기에 떠남을 아쉬워해서는 안 될 일이겠으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간을 두고 쌓아온 그 연이란 시간이 길든 짧았든 사연을 남기게 된다. 그 사연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풀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떠나는 사람을 위해 그렇게 '송별회'자리를 열어 석별의 정을 나눈다.
지금 직장이 다섯 번째 직장이니까 나 또한 송별회라면 지긋지긋할 만큼 해본 사람이다. 대부분의 회사생활을 자동차 부품 제조업에서 해 왔던 나의 동료들은, 업계가 조금 거칠었던 만큼 송별도 꽤 와일드한 방식으로 해 주었는데 별 건 없었다. 그냥, 셀 수 없을 정도로 아쉬움을 소주병수로 환산하여 우리의 다음날로 넘겼을 뿐.
가장 기억에 남는 송별의 시간은 내 20대 중반을 다 바쳐 일했던 체코의 외국인 노동자 시절이었는데, 2015년 새해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당시 생산관리팀 팀장을 맡고 계신 부장님께 귀국 의사를 밝혔다. 퇴직 시기도 꽤 넉넉한 세 달이라는 기간을 두고 사람들에게 이제 체코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는 말을 한 분 한 분씩 전하기 시작했다.
체코어를 현지인처럼 유창하게 구사하고, 공장의 에이스로 일하던 내가 불현듯 해외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많은 분들을 놀라게 했다. 같은 공장의 타 팀 분들부터 현대차 공장 주재원분들, 그리고 협력사 주재원분들까지 소식을 전해 드렸을 때 모두들 "아니 프리덱-미스텍 시장님인 조대리님이 왜요?"라며 눈을 크게 뜨고 반문하시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귀국을 한 달쯤 앞두고 체코 땅을 떠나는 게 현실화되자 나의 송별주간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대체 어떤 정신으로 그 짓을 했나 싶지만, 정말 주말이라도 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정도로 각지의 분들과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아쉬움과 재회를 약속하며 내가 남긴 소주병만 체코에 족히 세 짝은 될 것이다.
직장에서 만난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고도 이야기한다. 어차피 가고 나면 다시 못 보게 된다고. 시간이, 상황이 달라지니 어쩔 수 없이 그리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송별회에는 항상 아쉬움을 지워내기 위한 과거의 좋았던 추억만이 술상 위로 올라온다. 조금 서운한 게 있었어도, 그보다 더 큰 것이 앞으로 볼 수 없는 아쉬움이기에 이제 가면 어떡하냐, 가서 꼭 만나자, 연락해라 같은 지켜지지 않을 약속만 무수히 남겨진 채 끝나버린다.
나도 정작 그렇게 수많은 약속을 뒤로하였지만, 지금까지 예전 동료들을 어떤 의미로도 다시 만난 것은 다섯 손가락으로 셀 필요도 없을 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간이란 선형적이면서도 너무도 입체적이기에, 송별의 시간이 아쉬웠던 것은, 우리 모두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지금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볼 일은 앞으로 우연이 서로에게 겹치지 않는다면 쉽지 않다는 것을.
작년 언젠가, 구미공장에 출장을 가서 다음날 숙취에 힘들어하며 호텔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를 사서 잠시 로비에 앉아있었던 때에, 나를 알아본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예전에 체코에 있었을 때 설비보전팀에 계셨던 차장님이셨는데, 그 짧은 순간에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다시 그때로 돌아간 듯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반가워하며 스쳐 지나갔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송별회를 통해 서로의 마지막을 위로하는 것도 있지만, 언젠가 이렇게 우연찮게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 어색하지 않음을 암묵적으로 약속하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을 짧게 보냈든, 길게 보냈든 인연의 깊이는 장단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니, 아쉬움은 미래의 인연으로 다시 멀리 미뤄 버리자는 삶의 약속과도 같은 의미인 것이다.
다음 주쯤 이제 또 한 번 조직을 떠나는 두 사람을 위해 송별의 시간을 맞이할 때, 우리는 서운한 감정을 아쉬움에 담아 그저 언젠가 만날 미래에 다시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잔 한 잔을 또 오랫동안 비워낼 것이다.
직장인에게 있어서 송별회란, 이제 헤어짐을 기념하기 위한 마지막 자리가 아니라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 않고 잠시 서로 다른 길을 가기로 한 결정을 축복하기 위한 약속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