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의 길, 아빠의 길
어느 날, 다른 팀의 동갑내기 외벌이 팀장이 내 자리로 쓱 다가오더니 업무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한마디 툭 던졌다.
"근데, 나 육아휴직 쓰려고, 안될 것 같아 이제"
마케팅과 영업기획 쪽 일을 하고 있고, 비슷한 동네에 사는 데다가 그 팀장은 딸아이가 셋, 나는 딸아이가 둘로 여러 모로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공통점이 많았던 우리는 입사 후에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 녀석이 나보다 늦게 들어오긴 했지만, 회사에서 매일같이 마주쳐야 하는 시간의 누적은 단숨에 거리를 좁히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나로서는 같이 일하는 팀장으로도, 친분이 있는 사이로서도 급작스럽게 던진 그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냐며 회의실에서 잠시 동안 얘기를 나눠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휴직을 결정했고,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하려 한다는 확고한 의지가 들렸다. 그는, 그렇게 며칠 뒤 3개월 동안 육아휴직을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과거 2000년대 중반, 2010년대 중후반까지도 남자 직원의 육아휴직은 소위 책상을 빼고 쓸 각오를 해야 하는 유니콘 같은 말이었다. 그 법으로 명시된 공직사회조차도 받아들이기 힘겨웠던 아빠의 육아휴직은, 그나마 변화된 시대상이 오래 누적된 끝에 이제는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게 되었다.
벌써 내가 다니는 회사만 하더라도 여섯 번째 남직원의 육아휴직, 그중 두 명은 나와 같은 외벌이로 3개월 동안 휴직기간을 가지며 잠시 회사를 떠나 가정에 충실한 아빠의 의무를 다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도 내심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지금이 잠시 멈춰, 아이와 아내와 나의 가족에 최선을 다할 때가 아닐까?
특별히 육아휴직을 3개월 쓴다고 해서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니다. 단지 매일 아침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하원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려오고 하는 시간. 어질러진 집을 아내와 함께 정리해 나가며 우리의 보금자리를 더 다듬어 나가는 시간. 아직 말을 제대로 못 하는 둘째 딸의 눈을 맞추며 내 얼굴을 그 눈동자 안에 새겨 나가는 시간. 솔직히, 별 거 아닌 일들만 가득하다. 특별할 것 없는 그저 또 한 장의 삶자락.
그러나, 그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회복을 보내고 온 육아휴직 동료들의 표정을 보면 그건 틀림없이 각자의 삶에서, 힘든 현실에서 다친 자신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고 온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떠나는 날에는 언제나 지친 얼굴로 떠났던 그들이, 돌아오는 날 생기 가득한 얼굴로 돌아온 걸 보면 더욱이 그렇다. 물론, 일주일 정도 지나면 다시 핏기 없는 얼굴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런 걸 생각하면 한번 써 볼까? 싶다가도 막상 육아휴직을 쓴다고 생각하면, 발목을 잡는 여러 현실의 족쇄가 내 머리를 두드린다. 당장 매월 나가는 아파트 대출금과 생활비, 보험료, 아이의 유치원 비용 등 숨을 쉬어야 하는 돈을 계산하면 육아휴직 중 들어오는 휴직급여로는 어림도 없는 계산이 나온다. 결국, 처음의 호기로운 마음은 차가운 통장의 잔고 아래 질문이 바뀐다. '몇 개월을 까먹으며 버틸 수 있지?'
하지만 단순히 돈 문제만을 놓고 내가 육아휴직을 꿈꾸지 않고 팀장으로 직장생활을 이어가기만을 택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나의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 내가 직장에서 하고 싶은 일이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나 스스로를 두 딸아이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나 자신의 자아를 먼저 인식하고 있다.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기 전에 나 자신부터가 내세울 만한 멋진 내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고, 그를 위해 여전히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아내고 있다.
팀장으로서, 여전히 나는 시간은 오래되었지만 많은 것을 성취하지는 못했다. 벌써 3년이나 지났지만 변변한 업무 프로세스 하나 문서화하지 못했고, 여전히 조직과 시스템이 아닌 사람에 의한 일처리로 일의 홍수를 막아내고 있다. 회사에서는 비록 그 막아냄을 인정받을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뭔가 시스템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래서 오늘도, 팀을 만들기 위해 출근길에 오른다.
아이가 잠든 얼굴을 스치듯 보고, 문을 나선다. 언젠가, 정말 멈춰도 괜찮은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나는 내 자리에서 물러나 아이 곁에 서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더 이상 ‘회사에서 성취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아이의 시간 속에 남고 싶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날은 오늘보다 훨씬, 훨씬 더 빨리 다가올 거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