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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 아빠일기, 우리 집에 공주님이 산다

딸에게서 배우는 존중의 마음

by Karel Jo


요즘 우리 집에는 공주가 한 명 살고 있다.

정확히는, 자신을 공주라 칭하는 당돌한 5살 여자아이가 살고 있다.


며칠 전부터였을까,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고 돌아오면 언제나 두 딸아이가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와 반갑게 나를 맞아주고, 그 뒤로 지친 웃음을 보이는 아내를 안아주는 그런 날을 보내고 있을 일상의 한 자락에서 딸아이가 말했다.


"아빠, 이제부터 나를 공주처럼 대해줘"


순간적으로 나는 3초 정도 정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맥락 없는 요청이라니, 5살 아이가 원래도 특별히 두서 있는 이야기를 할 리가 만무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 말은 웃음으로만 흘려보내기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공주처럼 대한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 예쁜 캐릭터 드레스를 입히고, 장난감 성을 세워주고, 왕관과 갖은 보석을 안겨주라는 말일까. 아니면 그저 “너는 특별하다”라는 확신을 듣고 싶었던 걸까.


잠시 동안 대답이 없자 나에게 확신을 보채는 아이에게 나는 알겠다며 머리를 쓰다듬고 방으로 다시 뛰어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이 상황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딸을 ‘공주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가 양말을 혼자 신었을 때, 그림을 삐뚤빼뚤 완성했을 때, 심지어 동생과 다투다 울음을 터뜨렸을 때조차. 공주님과 더불어 말 끝에 존중을 담아 어미를 '요'로 끝내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공주님, 잘했어요.”
“공주님, 괜찮아요.”

그 사소한 별 것 아닌 호칭 하나와 말끝에 붙인 어미 하나가, 아이의 눈빛을 달라지게 했다. 말이 마치 진짜 왕관처럼 그녀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눈빛만이 아니라 정말 공주님처럼 나의 말을 사근사근 따르려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이가 원했던 것은 정말 글자 그대로의 공주님 대접을 원한 건 아니었다는 것을.


아이가 원한 것은 존중받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빠인 나에게서 사랑받고 있다는 확인을 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을 원했다.




아이를 키우며, 으레 부모님들은 자주 ‘효율’에 빠져 점점 부탁이 아닌 지시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말이 주는 뜻은 부탁일지라도, 부탁 아닌 명령과 지시의 어조로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빨리 양치해, 서둘러 옷 입어, 하지 마.”


속도를 내기 위해, 일을 줄이기 위해, 다급한 하루를 견디기 위해. 그리고 어느새 훌쩍 자라 버린 아이가 이 정도는 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속에, 그렇게 존중 없는 보호를 이어가고 있던 것이다. 딸의 ‘공주처럼 대해달라’는 한마디는 어쩌면 나를 일깨우기 위한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입을 빌려 내 마음을 흔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른이 된 우리도 다르지 않다.


회사에서, 사회에서, 관계 속에서 우리는 각자 나름의 왕국을 꿈꾼다. 내가 이뤄낸 성과를 인정받고 싶고, 존중을 받고 싶다. 내가 무슨 옷을 입든, 어떤 자리에 앉든, 나는 특별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존중받지 못하면 그날 하루의 기분이 좋지 않고, 인정받은 날은 무슨 부탁을 들어도 기분 좋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존중에는 힘이 있는 것이다.

딸의 말은 그래서 더 깊게 다가왔다. 그 다섯 살 아이의 바람은 결국 우리 모두의 바람이기도 하다. 그저 어른이 된 우리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뿐이다.


“나를 공주처럼 대해줘.”


그 순진한 요구를 대놓고 말할 용기가 없을 뿐이다.



아이의 말에는, 이미 어른이 되어 많은 걸 계산하는 나에게는 없는 순수한 본질이 있다. 아이가 말하는 공주처럼 대해 달라는 말속에는 화려함이 없다. 그 말속에 담긴 본질은, 사랑과 존중이다.

언젠가는 딸이 왕관을 내려놓을 것이다. 아마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친구들과의 비교가 시작되면 ‘공주’라는 말은 조금씩 사라질지도 모른다. 사춘기를 지나면, 오히려 그런 호칭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단단히 먹고 있는, 아빠는 방에 들어오지 말라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런 시간이 올 때까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딸아이가 스스로를 공주라고 믿을 수 있는 시간, 그 왕국을 지켜주는 건 결국 부모의 몫이라는 것을.

나는 기꺼이 그 왕국의 신하가 되어주려고 한다.


아침마다 서둘러 재촉하는 대신, 하루에 한 번이라도 그녀를 공주님이라 불러주려고 한다. 작은 성이라도 허락해 주고, 그 안에서 아이가 당당히 앉아 있을 수 있게 해주려고 한다. 그것이 그날이 올 때까지 아버지로서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대접’ 일지 모른다.

언젠가 딸아이를 재우던 어느 날 밤, 아이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빠, 나는 공주고, 아빠는 맨날 검은 옷을 입으니까 집사야."

"네가 공주면 아빠는 왕이어야지 왜 집사야?"

"원래 검은 옷 입으면 집사야, 내가 유튜브에서 다 봤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 또한 왕으로서 공주를 대해 달라는 말이 아닌, 집사의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해 달라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기쁘게 내게 주어진 이 달콤한 집사의 시간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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