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을 만한 롤모델이 되어야 하는데...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으레 그런 일이 생기게 된다. 잘 하는 사람, 보통은 자기 사수나 팀장이 만드는 자료를 복기하거나 만들어 드리거나 하는 과정에서, 점점 그 사람이 만드는 자료의 스타일처럼 내 자료가 변해가곤 한다. 그렇게 한동안 복사의 과정을 거쳐 거기에서 조금 파생된 내 스타일이 생기기도 하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리는 일도 생긴다.
나는 그러나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상위로 올려야 할 보고자료는 양식이 정해져 있으니 거기에 맞춰야 하겠지만, 내가 만드는 모든 자료와 이메일, 결재문서에는 나의 스타일이 있었다. 색감부터 단어 하나하나까지, 내 문서는 누가 열어봐도 내가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스타일리시한 직장인이었다. 일상생활과는 정반대로.
내가 선임이 아니던 시절에도 개성이 뚜렷한 직원이었기 때문에, 팀장이 된다고 하여 별로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나에게 일부 전결권이 주어져 문서의 양식을 정할 수 있는 힘이 생기자, 나는 내가 보기 편한 방식으로 문서를 정형화해가기 시작했다. 마치 동물의 영역표시처럼, 내가 떠나간 자리는 나의 흔적이 선명했다.
그러나 뚜렷한 나의 색깔과는 달리 나는 특별히 팀원들에게 나와 비슷한 톤을 유지하라고 말하는 편은 아니었다. 답습할수는 있겠으나 각자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기 때문에, 자료의 본질과 내용이 더 중요했지 어떻게 표현했느냐는 나에게 특별히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윗선에 보고해야 하는 내용 같은 것은 톤을 맞추게끔 요구하곤 했지만 대체적으로 나의 스탠스는, 알아서 하라였다.
그래도 어느덧 이제 팀원들과 같이 일한지도, 막내 팀원이 들어온 지 근 3년 가까이 되어가는 시점에 시간이 그만큼 많이 흐른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주니어급 팀원들의 자료 양식이나 스타일이 나와 동화되어가는 걸 바라볼 수 있었다. 단순히 자료의 틀을 떠나, 헤드라인에 치는 배색의 색감까지도 비슷하게 만들어지는 업무를 볼 때마다 나는 약간 기분이 묘해졌다.
그러다 최근, 막내 팀원이 이런 말을 꺼냈다.
"팀장님, 이메일 쓰는데 저 점점 팀장님 말투 닮아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뭘 어떻게 썼길래 그래?
노트북 안 아웃룩 이메일 칸에 작성된 내용을 읽고 있자니 실소가 나왔다. 짧은 실소 후에는 순간 서늘함이 몰려왔다. 문장의 구성, 단어의 선택 하나하나가 마치 내가 썼다는 걸 동네방네 알리듯 정말로 내가 쓴 것과 유사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 팀원의 MBTI가 나와 정반대인 ESFP인 걸 생각하면, 이 상황은 더더욱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나도 알지 못하는 때에 어느새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어 내 말투가, 누군가의 손 끝에 옮겨붙었음을 지켜보았다.
"GPT에 내 말투 학습시켰니?"라고 농담을 던지며 잘 썼다고 보내라고 팀원을 자리로 돌려보내고 나서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매번 알고는 있지만 간과하는 사실이 그 때 또다시 새롭게, 그리고 무겁게 느껴졌다. 선임으로서, 팀장으로서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구성원의 모범이 될 만한 모습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
좋은 선배란 무엇일까,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정답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에 대한 내 생각은, 누군가가 나를 모방하려 했을 때 나 자신이 그에 부끄러움을 느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있게 나의 삶을 얘기하고 청자의 반응이 그를 수용하려 할 때, 나는 본받을 만한 색깔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직 모자라고 부족한 점이 많은 나의 스타일을 누군가가 답습하는 이 상황은 내게 아직은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다. 작은 에피소드지만, 스스로가 더 부끄럽지 않게 내세울 만한 스타일을 가진, 본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느끼는 한 자락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자문을 던진다.
누군가가 당신의 색을 따라오려 할 때, 당당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