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잠시 우울할 수는 있지만, 털어낼 수 있기에
내가 성인이 되고 한 서른 살 남짓, 체코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되돌아와 두어 달 시차적응도 하면서 천천히 구직활동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약속이 있어 나가신 어머니 없이 오랜만에 나와 소박한 저녁을 드실 때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해외에서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살면서 잘 견뎌 주어 고맙다.
나는 그때 무슨 의미인지를 몰라 되물었고, 아버지께서는 본인의 어머니, 즉 나의 할머니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나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내가 2살 무렵에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는 친할머니는 항상 잘 기억나지 않을 내 돌 무렵의 사진에 알듯 말 듯 한 미소로만 남아 계셨다. 아버지께서도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잘해주신 건 아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들은 것이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드셨다고. 그래서 나에게 물림 될까 우려하셨다고.
우울증이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는 건 이미 의학적으로 답이 나온 결론이다. 그러나 부모가 우울할 경우, 자식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되는 사실이다. 우울증에 빠진 산모의 상태가 태아의 뇌에 영향을 끼친다거나, 어릴 때의 잘못된 유착관계로 인해 정서발달이 왜곡된다거나 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아버지의 담담한 말을 들었을 때는 아니라고, 괜찮다고 웃으며 말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나 스스로가 우울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고, 다만 스스로도 자신을 감정에 무딘 사람이라고 덮어두었기 때문이었다.
2년 전, 정식으로 우울증, 정확히는 기분부전증으로 인해 정신과 및 심리상담 치료를 진행했을 때 나는 딱 한 가지를 바랐다. 그리고 그건 내가 치료를 결심하기로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나는 그때 아버지께서 나에게 해주신 말을 기억했고, 내 딸아이에게 그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부모의 우울을 견뎌야 하는 자식이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가. 하물며 그게 채 3살도 되지 않은 아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당연히 성장기 아이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인데도 나는 혹시 나의 불안과 우울이 아이의 그릇된 애착을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해 고민했고, 그렇게 정신과 문을 두드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똑한 내 아이는 지금에 와서도 가끔 자기 전 책을 읽어주는 나에게 묻곤 한다.
"아빠 근데 예~전에 아빠 슬퍼서 많이 울었잖아. 지금도 슬퍼?"
"아니, 이제 아빠는 괜찮아. 너랑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있으니까"
"아빠가 안 슬펐으면 좋겠어"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을 테지만 나로서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내 스스로 살기 위해서 여과 없이 토해낸 감정들이 이 아이의 머릿속에도 남아 있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고 하기엔 서로가 같이 살아내고 이겨내기에 이 녀석에게도 감정들이, 자라나고 뽑혀나가면서 영향을 받고 있구나.
살며시 안겨오는 아이를 보며 그럴 때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속으로 참아내려 애쓰며 다짐하고, 바라게 된다.
나는 여전히 힘들고, 주체할 수 없는 하루를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부모의 우울을 견뎌야 할 의무는 자식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에, 너만은 가져가지 않길 바라는 이 감정을, 가져가도 빨리 털어내 버리길 바라는 이 어두움은 내 대에서 끊어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