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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30분, 나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의 힘

군상 속에, 나 자신을 잃지 말라던 그 말

by Karel Jo


심리상담센터에서 먼저 검사를 받은 후, 기분부전증에서 심화된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려 주셨던, 내가 만났던 첫 정신과 선생님은 굉장히 온화한 분으로 나이가 좀 있으신,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여러 마음과 함께 하신, 특별히 뭔가 과학적이거나, 최신식 검사를 동반한 것은 아니었으나, 병원을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다소 편해질 수 있게 하는 그런 공간을 운영하시는 분이었다.


약 9개월 남짓 선생님과 2주 간격으로 꾸준히 치료를 진행하면서 선생님께서 해 주셨던 말씀 중 가장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잘 지키지 못하는 말이 있다.


하루 30분이라도 좋으니 온전히 나 자신으로 있는 시간을 살아 보세요. 뭘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아요. 환자분이 편안하게 있을 수 있다면 그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다양한 군상 속에서의 나 자신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버스에 나를 태워 잠시 동안 다시 부족한 잠을 채우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누군가의 팀장이고 누군가의 동료, 누군가의 부하직원으로 수없이 이름을 덧씌우며 나 자신을 칠했다.


먹물로 시커멓게 뒤덮인 퇴근길 속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반겨 주는 딸아이들과 아내, 그리고 그 속에서 또다시 덮어지는 아빠와, 남편이라는 이름. 나에겐 수많은 이름이 있었고 나는 아마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도 더 심하게 짓눌려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상담 중에 선생님은 언제나 나에게 그 말씀을 강조하셨다. 나 같은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자신이 뒷전이라고. 자기가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 언제나 자기 자신을 맨 마지막에 두고 삶을 불태워 내기 때문에 남아 있는 조각이 얼마인지도 눈치를 못 채고 뒤늦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고.


그렇기 때문에 하루 30분이라도 좋으니,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나 자신이 오늘 뭘 했는지, 괜찮았는지, 스스로를 좀 더 아끼라는 말씀이었다.


생각이라는 건, 대부분의 부전증 또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나는 무언가 생각을 할 때나, 과거를 되새길 때나, 또는 미래를 가정할 때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보면 그 문제의 원인을 찾는 첫걸음이 나에서부터 오기 때문이다.


'내가 이랬다면 어땠을까'

'내가 좀 더 노력했으면 막을 수 있었을까?'

'내 표현이 섣불렀기에 그런 반응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들은, 나 자신을 움츠리게 만들고 종국에는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는 중요하지 않아ㅡ라는 생각으로 가 버리게 만든다. 아마도 나는 그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나를 잃어버려 왔던 모양이다.


그래도 선생님께서 그 말을 해주신 날부터, 나는 조금 더 내 입장에서 이기적으로 생각하면서 내 이름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을 조금씩이라도 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물론, 하루의 시작과 끝에 나를 옭아매는 무기력증은 때로 그런 생각조차도 사치라는 듯이 괴롭혀 오지만, 언젠가는. 괜찮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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