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휴일에 좀 더 관용을 보이는 사회였으면
나는 1993년도에 내가 태어난 군산에서 안산으로 부모님을 따라 올라왔다. 군산에서 공장을 다니고 계시던 아버지는, 오랜 시간 동안 현장에서 일을 하셨지만 그 일만으로는 남은 평생을 담보할 수 없다 생각하신 것과, 본인께서 하고 싶으시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상경하기로 결심하셨다.
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아직도 군산을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의 기억은 꽤 선명하게 남아 있다. 떠나기 전 부모님과 친하게 지내던 친구분들의 가족과 갈빗집에서 어른들이 시간을 보낼 동안, 나는 같은 유치원을 다니던 여자아이와 7살의 이별을 나누고 있었다.
‘회사 안이 전쟁터라면, 회사 밖은 지옥이다’라는 그 말처럼, 야심 차게 직장 생활을 나오고 접한 아버지에게 90년대의 자영업은 지금 시대 기준으로 정말 야생의 그 무언가였다.
고도로 성장하는 시기의 단물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 법과 불법을 나누는 회색지대는 점점 짙어만 갔고, 그런 사람들을 매일같이 받아야 하는 식당을 조금 운영하다 어머니의 건강이 그리 좋지 못했던 탓에 아버지는 공장을 다니시던 시절 틈틈이 공부하셨던 사진을 살려 사진관을 차리는 것으로 새로운 곳에서 새 출발을 시작했다.
부모님께서는 우리 세 명을 키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계셨고, 자영업의 특성상 주말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그때는 아직 주 5일제가 정착되지 않아 토요일도 오전엔 학교를 가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기도 하고 말이다.
그나마 사진관의 경우 주말에 나들이를 다녀오신 분들이 찍은 필름을 월요일에 주로 맡기셨기 때문에 주말보다는 월요일이 더 바쁘긴 했어도, 자영업이 주말 장사를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도저히 주중에 시간이 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주말에만 찍어야 하는 사진들도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주말에도 항상 사진관 문을 열어 두셨고, 언제나 밤 8시 정도에 가게를 정리하고 집으로 와서 늦은 저녁을 다 같이 먹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사셨던 부모님께서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가족으로서의 추억을 만들어주시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을 하셨던 것 같다.
비록 그 짬이 자주 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몇몇 장면들이 여전히 기억에 선한데, 어디 멀리 가지도 못해 당시 수인선 철도길을 걸으며 매번 다른 사람을 찍으니 우리 자식들 나중에 추억으로 남으라고 사진도 찍고, 갈빗집도 가자며 나들이 아닌 나들이를 나갔던 기억이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사진을 찍히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지만, 노력하시는 아버지의 손을 보면 아버지가 찍자고 하시던 순간만큼은 사진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다 IMF가 오고 나서, 디지털카메라가 보편화되면서부터 사진관은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지금에야 사진관들이 대부분 스튜디오로 탈바꿈하고, 컨셉사진을 찍는 몇몇 스튜디오만 남았지만, 당시 코닥과 후지로 양분된 필름 현상집과도 같은 많은 사진관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어야 했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나마 아버지께서 사진과 영상을 공부하신 게 있어 스튜디오로 전환해 10년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었지만, 자라는 아이들에 비해 소득은 점점 더 쪼그라들었고, 부모님은 더 많이, 더 바쁘게 일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실, 나는 ‘어린이날’이라는 날에 뭔가 그렇게 특별한 추억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다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신 결과물이지만 부모님께서는 언제나 바빴고, 공휴일은 설날이나 추석 정도가 되지 않는 이상에야 우리 집에는 공휴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도, 직장에서 팀장이라는 위치에 오르게 되니 점점 나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가정을 돌볼 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내가 책임지고 있는 조직에 대한 책임감을 무시할 수 없는 위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인’이라는 이점을 나는 최대한 활용하여 남들 쉬는 공휴일에 쉬면서, 아이에게 나의 부모님이 해주시지 못한 것들을 해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보고 있다.
비록, 재무회계팀이라는 업무 특성상 월초에 공휴일이 몰리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남들 쉬는 날에 일을 하고 대체휴일을 받아가는 운명이지만, 그래도 나의 아이에게 ‘어린 시절의 어린이날에는 아빠와 함께 어디서 뭘 했었는데’라는 기억이 미래에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예전에 체코에서 외노자 생활을 할 때 불편하면서도, 놀라웠던 점은 대부분의 가게가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문을 닫는다는 점이었다. 그건 아마, 보통의 사람들이 누리고 싶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또한 누군가의 가족이자 가장이니, 그들에게도 삶을 누릴 권리가 있기 때문에 발전한 하나의 사회적 합의일 것이다.
내가 주말에 커피를 마시고,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고 놀이동산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 서비스를 제공하시는 분들은 나의 휴식을 위해 일해 주시고 있지 않은가. 어느 순간부터 그래서 나는, 주말에 아이와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일하시는 분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게 되었다. 우리의 추억을 위해 일해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비록 이번 어린이날은 때아닌 독한 감기가 돌아 색다른 추억을 안겨주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앞으로도 매년 지금의 노력을 이어가며 언젠가 아이가 ‘어린이날’을 추억할 때 얘깃거리가 넘쳐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그 아이의 미래에, 내가 한 장의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