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깊이에서, 넓이로 나아가는 커리어 방향
2011년부터 직장 생활을 시작한 나는, 내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직장인으로 살아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에 다니기로 한 이유부터가 가정의 어려운 상태를 돕기 위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였고, 이후로는 유학 자금을 모으겠다는 이유와 겸사겸사 현지 적응도 미리 하겠다는 마음으로 한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회사에 취직하면서도 뭔가 특별히 하고 싶은 직무가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일'을 할 수 있다면, 정확히는 '돈'을 벌 수 있다면 직무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나는 대학교 내내 체코어, 슬로바키아어, 러시아어만 전공한 회사 일이라고는 아무 짝에도 관련 없는 공부만 한 사람이었으니까.
처음 면접을 봤을 때도 그래서 왜 회사에 입사하고 싶은지는 뭐라고 대답한 지 기억이 나도, 무슨 일을 해서 기여하겠다고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아마 그냥 그때 그때 이 일을 통해 어떻게 기여하겠다기보다는, 빨리 배우고 오래 다니는 성격이니 우직하게 해 나갔다는 식으로만 말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지금의 직장이 5번째 직장이지만, 회사별로 모두 다른 직무로 입사한 잡탕밥 커리어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중소기업의 경영지원팀-인사총무로 시작한 청년은 해외 자동차 공장의 생산관리를 거쳐, 외국계 회사의 원가회계/재무기획을 지나 코스닥 중견의 기획팀을 건너 지금의 재무회계팀에 이르렀다.
그나마 지금은 재무회계, Finance 분야로 완전히 커리어가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계기는 체코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원가기획 일을 시작했던 회사에서부터였다. 당시의 나는 약 4년여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부모님은 1년 정도는 쉬어도 된다 하셨지만 두 달 만에 내가 좀이 쑤셔 시차적응이 끝나자마자 일자리를 다시 찾던 때였다.
그래도 완성차 부품의 해외공장에 오랜 기간 있던 탓이라, 생산관리니 PM이니 하는 직무들의 경력직 면접을 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때 나는, 이노텍의 PM이냐 이 직장의 원가기획이냐를 고민하는 참이었는데, 직감적으로 PM보다는 뭔가 문과로서는 숫자와 관련된 일을 하는 편이 나중에 더 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합격은 했지만, 회계, 그것도 원가회계에 관련된 지식을 공부한 적은 없기에 한동안 헤매기는 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따로 공부하고 모르는 것은 몸으로 익히며 구른 덕에 빠른 시일 내에 적응은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당시 나를 채용하신 이사님과 담배 한 대를 피며 얘기할 일이 있었을 때, 요새 많이 늘었네 하고 말씀하시는 이사님께 나는 그때 숫자 경력이 없던 저를 왜 경력직으로 뽑았냐 여쭈었다.
그리고 이사님께선,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니 때에는 자기 일 전문적으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최고라 하겠지만, 나중에 위로 오면 어차피 전반적으로 볼 줄 알고 방향 잡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숫자만 보는 사람들은 이 숫자가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 몰라. 근데 넌 현장에 있었고 제품이 나오는 구조를 알잖아. 숫자는 내가 갖다 붙여주면 되지. 잘하고 있고 요즘"
나지막이 담뱃불을 끄시고 나서 "그래도 니 회계랑 원가 공부는 꾸준히 해야 된디"하고 전화를 받고 먼저 들어가시는 이사님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경험이 많다는 게, 나의 장점이 될 수도 있을까 하는.
그 회사에서 근 6년을 일하면서 많은 걸 배우고 나니, 나의 커리어는 '생산관리를 직접 해본 제품의 특성을 알고 있는 원가쟁이'가 되어 있었고, 다른 회사로 이직할 때에도 어렵지 않게 면접 기회를 받아 여러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때 이사님이 말씀하신, '스페셜리스트에서 제너럴리스트로 성장하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한 팀의 팀장이자, 15년 차 직장인으로서 나도 이제는 중간관리자와 누군가의 선배 포지션에 서게 되었고, 후배들이 커리어 성장으로 고민하는 광경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리고 후배들이 나를 보며 조언을 요청할 때 나도 이제는 으레 이렇게 말하곤 한다.
"지금 하는 일, 만드는 자료들에 대해 네가 최고라는 마음으로 완벽하게 네 걸로 만들게 되면, 점점 다른 일을 할 기회도 주어지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업무가 확장되게 될 거야. 내가 그래왔던 것처럼, 나도 기회가 될 때마다 그런 방향으로 열어줄 테니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건 얘기하자."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도 아직 내 다음 커리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내가 직장인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지는 내 마음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나는 이제 상황과 방향의 앞에 서 있는 조율자, 제너럴리스트의 역할을 잡은 사람이지 나 혼자 잘했던 스페셜리스트, 에이스의 입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지금 기로에서 고민한다면 한 마디를 곱씹어 보자.
'한 우물을 깊게 파서, 그 끝이 다른 우물로 이어지게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