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그 무언가 사이에서
"이번 closing에서 우리가 focus 해야 하는 issue나 bullet point 있으면 미리 사전에 align 해서 share 해 주시고요.
Reserve 할 것들 있는지 reverse 할 것 있는지도 미리 check 해 주세요.
Lesson learn 한 게 있으니까 gate keeper들이 잘해줘야 합니다"
내가 현재 다니는 회사는 밀워키에 본사가 있고 사모펀드 또한 미국에 있는 미국계 회사다. 아시아 지역의 권역 대표는 아직까지는 중국이 맡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에는 중국 따로, 한국이 아태 지역을 대표하는 구조로 조직이 짜여 있었다. 예전에는 본사에서 파견한 주재원도 있었다 하던데, 일단 현재 한국에는 본사 소속의 외국인은 없는 상태다.
본사가 미국 회사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사내의 모든 공식 문서는 '영어'로 작성되어야 한다는 말을 의미한다. 이메일로 보고할 때나, 전자결재 문서를 작성할 때나, 또는 본사나 타 외국 법인과 회의를 해야 할 때 단 한 사람이라도 같은 국적이 아닌 사람이 섞여 있다면 공식 언어는 '영어'로 진행된다.
따라서 회사에서는 일정 이상의 영어 능력이 요구되며, 단순히 말을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작문, 듣기 등등 전반적인 언어능력이 위로 올라갈수록, 그 직책이 중요한 위치일수록 더 강하게 요구받고 있다. 또한, 안타까운 일이지만 비슷한 업무 능력을 지녔다고 할 때 승진이나 회사 생활에 가점을 받는 것도 언어능력의 유무다. 억울하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만, 결국 업무 능력을 말로 입증하는 것도 능력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외국어를 전공한 나는 조금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거기에 나는 아내를 만난 지 벌써 8년도 더 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둘이서 영어로만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후천적 이중언어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어휘량이 원어민 같다는 말은 아니지만, 더 이상 영어로 말하는 데 머릿속에서 한국 문장을 영어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처음 딸을 가졌을 때 나와 아내는 선천적 이중언어를 타고날 자녀들을 위해 가급적 문장에는 두 언어를 섞지 말고 한 문장은 한 언어로 끝내기로 합의를 봤다. 아마도 그래서일까? 나는 문장의 절반 이상을 굳이 외국어로 치환해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굉장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모국어가 없는 '0개 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보는 기분.
글의 서두에 소개한 문장들처럼 외국계 회사를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문장의 조사를 제외하고는 단어를 영어로 대체해서 말씀하시는 분들이 꽤 많다. 이미 고유명사화 된 팀이라든지, 프로젝트라든지 하는 단어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동사를 굳이 영어로 쓰는 건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기는 하다.
한때 인터넷상에서도 '보그체'니, '판교어'니 하는 비슷한 느낌으로 유행했던 적이 있는 이 말투를 구사하게 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자고 하면, 높은 확률로 그런 분들은 이런 이유를 말하셨다.
그 단어가 주는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를 전달하기 쉽지 않다
어투는 개인의 취향이자, 특성이기 때문에 내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부분은 아니겠지만, 나는 말이란 어렵게 하면 어렵게 할수록 상대방을 오히려 혼란에 빠뜨리고,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뉘앙스의 차이는 듣는 사람을 생각한다는 건데, 상대방이 모국어 화자인 경우 오히려 외국어의 뉘앙스를 모른다면 과연 저 이유가 쓸모 있는 이유일까?
오히려, 보통 높은 분들이 외국인들과의 회의가 잦다 보니 본인의 편의에 맞춰 한국어와 외국어를 혼용해 자아를 버렸다는 점이 더 타당한 접근이지 않을까. 뭐, 그것도 다 개인이 처한 상황에 대한 나름의 대처일 테니 최대한 이해는 하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의사나, 연구자같이 전문용어를 외국어로 쓰는 게 당연한 직군이 아니고서야 0개 국어 구사자 분들이 다시 1개 국어로 돌아오시길 바란다.
스마트폰에 AI가 탑재되면서 쌍방향이 음성으로 자기 언어를 말하면 바로 통역해 주는 서비스를 한번 이용해 본 적이 있다. 장모님께서 방문하셨을 때 아직 아이가 우크라이나어를 잘 말하지 못해 의사소통을 위해 빌려 준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성능이 좋아 장모님께서도 신기해하시고 만족하셨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AI가 통번역을 완벽히 대체하게 된다면, 0개 국어는 발자취를 감추게 될까? 아니면 일본어처럼 우리나라의 많은 어휘들이 0개 국어 구사자들에 의해 대체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