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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떨어져 나간 날

by 알펜
sash-bo-h5zPrKZ5IdM-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Sash Bo



새까맣게 죽었던 손톱이 드디어 모두 떨어져 나갔다. 손톱깎이로 군데군데 모난 곳을 가지런히 다듬었지만, 짧게 잘린 뭉툭한 손톱은 아직은 단단하게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한 채 연한 살을 드러내었다.


사고는 잠깐이었다. 봄과 여름을 넘어가는 계절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강가에 자리한 지리적 특성 때문이지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다. 열린 창틈으로 기어들어 온 강한 바람이 철문을 세차게 때렸다. 쾅, 하고 닫힌 현관문에 오른쪽 엄지가 짓눌렸다.


신음조차 순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파서, 눈을 꾹 감았다. 아픔에 비해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은 새카맣게 멍이 든 손톱을 그림자처럼 매달고 다녀야 했다.


보는 사람마다 엄지손톱 얘기를 하며 걱정하길래, 짙은 색 매니큐어를 발랐다. 덕분에 잘 바르지 않았던 다른 손마저 화려하게 치장한 여름을 지났다.


상처는 손톱 끝으로 점차 내려왔지만, 손톱은 제 기능을 상실했는지, 떨어져 나갈 듯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여름 끝자락부터는 밴드를 감고 다녔다. 출근하기 전에 밴드를 한번 감아놔야 부스러진 손톱이 너덜거리지도 않았다. 새로운 손톱이 단단하게 자랄 때까지 어느 정도 버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늦은 봄을 거쳐 뜨거운 여름을 지나 이제 가을 끝자락에 도달했다. 10월 말이 되어서야 겨우 연한 손톱이 제자리를 찾듯이 상처를 덮었다.



손톱을 가다듬으며 한해를 돌아봤다. 올해는 참 다사다난했다. 멍이 새카맣게 든 손톱처럼 마음도 새카맣게 물들었다가 가끔은 파란색으로 적당히 풀어지고는 했다. 감정의 기복이 극과 극을 오갈 정도로 변동 쳤고, 양복 주머니에 회사원들이 넣고 다닌다는 사표처럼 세 번쯤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화장실에서는 두 번쯤 몰래 울었던 것도 같다.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일과 사람이었다. 특히 사람. 타인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질척한 악의. 혹은 상대방을 누르고 말겠다는 천박한 우월감.


사람은 선을 행해야 하고 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의도치 않게 피해를 끼칠 수는 있으나, 의도를 가지고 악행을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사람, 소중히 여겨진 적이 없어서 마음에 상처가 많은 사람. 세상이 각박하고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결국 내부의 상처를 날카롭게 갈아서 밖을 향해 거침없이 휘두르는 사람.


어느 정도는 단련되어 있다고 착각하고 살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커먼 악의가 아교처럼 달라붙었을 때, 꽤나 내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에 대한 회의감과 약간은 자포자기,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오곤 하는 자괴감과 분노가 연달아 이어졌다.


손톱의 상처가 떨어지는 날, 내 마음의 상처는 떨어졌을까? 천둥과 번개, 장마와 가뭄을 겪고 나이테를 새기는 거목처럼 멋진 자국이 남았을까? 아니면 흉측한 흉터로 남아 그들처럼 타인을 공격하는 칼이 될까?


같은 상처를 지닌 타인을 공감해 주는 수도꼭지가 되기를 바란다. 물처럼 감정이 쏟아져 내리는 한이 있더라도 상처 입은 사람들의 편에 서기를 바란다. 언제나 게으른 나는 복수는 타인이 해준다는 말을 마음 깊숙이 믿고 있으니, 복수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내 손으로 안 할 뿐이라고 자위한다.


그렇게 믿는다.


#겨울이오는구나

#인간에대한믿음

#나에대한믿음

#자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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