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poli & Pompei 8.10, 2007
Part Two
내리막길 끝이 보인다. 도로 건너편, 내려가는 차선 쪽에 버스 정류장이 내 시선을 잡았다. 버스를 기다리며 애들에게 엘모 성에 가지 말고 기차역으로 가서 저녁이나 먹자고 했더니 아들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저 성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꼭 봐야 한다고 여행책에서 그랬는데..."
그때 단테 광장으로 가는 버스가 우리 앞에 섰다. 겨우 두 정거장, 사람들로 북적이는 단테 광장이 나타났다.
'박물관이 끝난 지점에서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어야 했는데! '산 엘모' 이정표에 속지 말고 지도를 더블 체크했었더라면...'
버스 안에서 유리창 너머로 커다란 글씨 'Funicolare'가 눈에 들어왔다. 골목에 들어서자 피자와 샌드위치 등을 파는 오래된 가게들 뒤로 멀리 가파른 잿빛 산 허리에 목탄을 이어 붙인 것 같은 경사진 레일이 보였다. 서둘러 티켓을 구입하고 푸니쿨라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바로 옆 승강장에 지하철이 들어온다.
'성에서 내려와 바로 저 지하철을 타면 로마행 기차에 늦진 않겠지.'
푸니쿨라는 내부가 특이하게도 계단형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극장같이 층층이 배열된 좌석에 20명 정도의 승객이 앉을 수 있는데 늦은 오후라 그런지 빈자리가 많았다. 거친 체인을 감는 것처럼 요란한 소음을 내며 드드득 진동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6분 후면 성이다.
푸니쿨라 승강장을 나오면 바로 성이 보여야 하는데 또다시 집들과 골목으로 둘러싸였다. 공기엔 이미 저녁의 느낌이 스며들고 있었다.
'시간을 아끼려면 또 버스를 타야 하나?'
다시 갑갑한 마음으로 동그란 정류장 푯말 밑에 섰다.
"엘모 성에 가려고?"
울림이 큰 남자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흰색 티셔츠에 군인처럼 짧은 머리를 한 남자가 두꺼운 갈색 시가를 물고 서있다.
"여기서 버스 타면 되나요?"
담배 연기에 한쪽 눈을 반쯤 감은 채 손짓으로 아니랜다.
"버스는 무슨... 이 골목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엘모 성이야."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가 말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창문 사이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파스텔톤의 고급 주택들 사이를 걷고 있는 우리 세 명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양쪽 담에 부딪쳐 에코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오르막길에서 본 집들과 이곳의 건물들을 비교하다 말고 개똥이 묻은 내 신발의 안부를 묻는다.
'너무 늦게 와서 안 들여보내 주면 어쩌지?'
다행히 우리 외에 3명의 관광객이 더 정문으로 들어섰다. 친절한 직원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로 성위에 올라가니 5명의 관광객들이 난간 쪽에서 풍광을 즐기며 거닐고 있었다. 이곳에선 길 위에서 와는 전혀 다른 나폴리가 펼쳐졌다. 바다와 인접한 옛 성과 궁전은 이미 석양의 그림자 속에 들어가 버려 윤곽만 드러났지만 폼페이를 화산재 속에 묻어버렸던 베수비오(Vesuvio) 산의 분화구는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또렷이 보였다.
조금만 더 있다 가자고 조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푸니쿨라 승강장으로 돌아왔을 땐 시곗바늘이 6시 40분을 지나고 있었다. 로마행 기차는 7시 40분. 기차역까지는 지하철로 두 정거장이지만 나는 마음이 급했다. 둘째는 산 아래 승강장 앞에 있던 피자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잰다. 나폴리 피자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맛있다는데 먹고야 싶지만 피자를 먹으면 로마에 오늘 못 가게 된다고 했더니 얼굴에 가득하던 배고픔이 바로 사라지고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푸니쿨라에서 내리자마자 옆 승강장으로 달려가 여기서 타면 중앙역으로 가냐고 역무원에게 물었더니 정문을 나가서 왼쪽으로 가면 다른 지하철역이 있고 중앙역 가는 기차는 거기서 타라고 했다. 네모난 새까만 돌들로 우둘투둘한 길을 내달려 조그만 지하철역을 찾았다. 매표소에서 표를 받고 다시 승강장을 향해 뛰어가다 멈춰 섰다. 오른쪽과 왼쪽 승강장 중 어디로 내려가야 하는지 입구에 붙어있어야 할 안내판이 보이질 않는다. 망설일 틈이 없어서 그냥 왼쪽 계단을 내려가 숨을 헐떡이며 처음 눈이 마주친 사람에게 방향을 물었다.
"그럼요, 중앙역 가죠."
하-흐-하-흐-,. 나를 따라 열심히 뛰어왔던 아이들의 가쁜 숨소리는 벤치에 앉아서도 계속됐고 나는 발 뒤꿈치를 들고 검은 승강장 끝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지하철이 언제 들어오는지 안내 방송도 없다. 조금 전 내가 방향을 물었던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백인 남자가 자신은 미국에서 왔다며 우리 국적을 물었다.
"South Korea."
기차가 들어오는 방향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로마행 기차는 15분 후에 출발하는데...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서늘한 땀이 싫었다. 만약 기차를 놓치면 어찌해야 할지... 호텔, 속옷, 추가 비용, 아침 기차... 단어들이 머릿속을 휘저어 놓았다.
둘째가 미국인의 허리에 매여진 불룩한 가방을 가리키며 무엇이 들었냐고 물었다. 그가 자기 배를 내려다보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내용물을 마술사처럼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앙증맞게 생긴 망원경, 파일럿 선글라스, 접힌 지도, 가는 손전등, 가위가 달린 빨간 스위스 칼까지. 애들은 조그만 칼집에서 모양이 다른 칼날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보고 정말 마술 같다며 눈이 동그래졌다. 그가 나에게 폼페이에 들렀는지, 박물관은 가볼만하던지, 엘모 성에도 갔는지, 다른 도시는 어딜 다녔는지, 여행한 지 얼마나 됐는지 계속 물었다. 지금 이 상황이 아니라면 길고 길게 얘기해줄 수 있으련만 새침데기처럼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하고 터널 속에서 두 개의 불빛이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지하철이 들어온다! 다행히 오전에 탄 지상철과 달리 문이 재빨리 닫혔다. 속도를 내는 객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다음다음 역에서 내리자마자 뛰어야 해. 딴 데 보지 말고 엄마만 따라와. 넘어지면 엄마 놓칠 수도 있어."
"걱정 마세요. 우리 잘 달려요."
둘은 손을 꼭 잡고 문이 열리면 바로 튕겨져 나갈 준비를 했다.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라가 까만 보드판에 하얗게 박힌 수많은 글자들 가운데 Roma, 7:40, 플랫폼 번호를 확인하고 시계를 올려다봤다.
"2분 남았어. 이쪽이야, 뛰어!"
금방이라도 움직일지 모르는 기차의 첫 번째 객차에 오르자마자
"살았다!!"
그런데 뭔가 낯설다. 이제껏 우리가 탔던 모든 기차는 KTX처럼 통로 양쪽에 좌석이 배치된 구조였다. 그런데 이 기차는 해리포터가 타고 다니던 couch. 예매한 티켓의 좌석 번호와 일치하는 객실이 나올 때까지 좁은 복도를 따라 걸었다.
'여기다.'
커다란 창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파란 좌석이 3개씩 붙어있었다. 통로에서 첫 번째 의자에 은회색 머리카락을 멋스럽게 빗어 넘긴 남성이 청색 재킷을 입고 한 손에 접은 신문을 든 채 앉아있다.
"Is it heading for Rome?"
"Of course. It's FIRST class."
애들은 창가 자리를 하나씩 차지했고 나는 노신사와 대각선으로 중간자리에 앉아 배낭에서 지도를 꺼냈다. 지도 위에서 중앙역의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고 다시 기차표를 보았다. 출발 시각은 같은데 기차역 이름에 중간과 끝 이니셜이 다르다! 우리가 탔어야 하는 기차는 아침에 로마에서 타고 온 기차가 도착했던 바로 그 역에서 세 자리가 빈 채 로마를 향해 지금 출발하고 있을 것이다. 청량리 기차표를 들고 서울역에서 기차를 탄 셈. 이제야 왜 오전에 지방철도 환승구를 못 찾고 지상철을 타는 상황이 벌어졌는지를 알게 됐다. 지방철도와 연결된 Piazza Garibaldi역은 중앙역 바로 옆이다.
'검표원이 벌금이라도 내라고 하면 어쩌지?'
그때 20대 남녀를 포함해 식구로 보이는 어른 네 명이 커다란 여행가방을 앞세우고 비좁은 통로에 나타났다. 우리를 향해 하얀 기차 티켓을 흔들며 자기네 자리란다. 옆좌석에 둔 가방을 들고 막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노신사가 그들을 향해
"내가 좀 전에 이 사람들 티켓을 봤는데 좌석번호가 맞아요. 매표소에서 착오가 있었나 본데 다른 데 가서 앉아요!"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기가 눌렸는지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검표원에게 물어봐야겠다며 짐을 끌고 일행과 함께 사라졌다.
'내 실수 때문에 참 여러 사람이 고생이누나.'
아이들도 나처럼 위기 상황이 지나자 새롭게 발견한 사실들이 있었다. 작은 애는
"엄마, 배가 너무 고픈데 카트는 언제 와요?"
" 어, 가방에 모자가 없네."
큰애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어디선가 모자가 벗겨진걸 이제야 깨달았다.
"괜찮아, 기차를 탔으니 모자는 제우스에게 제물로 바친 셈 치자."
그때 검표원이 왔다. 그런데 기차표에는 눈길도 안 주고 유래일 패스만 열심히 들여다보다가 돌려준다.
'Thanks, GOD!'
"카트다!!"
애들이 동시에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선잠에 빠져들던 노신사가 화들짝 놀라면서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샌드위치와 주스를 애들에게 건네며 그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푸니쿨라를 찾아 헤매느라 저녁식사를 못했어요."
"아~, '푸니쿨라'라는 노래 들어본 적 있어요?"
하며 바로 한 소절을 어깨와 팔로 리듬을 타면서 파파로티가 부르는 것과 똑같이 부른다.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지만 그게 타는 물건 이름인 건 오늘 알았다고 하자 그가 껄껄 웃었다.
연착된 기차는 10시가 넘어 로마에 도착했다.
'호텔로 돌아가기만 하면 이 긴 하루도 끝난다.' 홀가분하게 역을 나와 지하철을 타러 갔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지하철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 쇠창살이 내려와 있었다. 로마의 지하철은 10시까지만 운행한다니... 역무원이 야간 버스 번호를 쪽지에 적어주며 정류장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약국 앞이라는데 약국은 또 어디서 찾나?'
어둠 속 닫힌 상점들 사이에서 약국과 버스가 보였다. 버스표를 파는 따바끼(담배) 노점상도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버스 기사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그냥 타랜다. 호텔 이름을 묻더니 내릴 정거장에서 자기가 수신호를 하겠단다.
샤워를 끝내고 나오니 아이들은 입을 벌리고 쌕쌕 자고 있다. 침대 끝에서 매트리스 위에 무릎을 데고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는데 허벅지가 가로로 욱신거린다. 울퉁불퉁한 돌길에 부딪치던 밑창이 얇은 내 샌들 소리가 다시 귀에 울렸다. 유럽여행 중 최악의 날이긴 했지만 항구에 정박한 미국 군함이 한밤중에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나폴리에서 무사히 돌아온 걸 감사하며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