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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 Seeker Aug 27. 2016

아이 둘 데리고 유럽으로-8

Napoli & Pompei 8.10, 2007

Napoli & Pompei 8.10, 2007


Part One

폼페이 유적지에 가려면 나폴리에서 지방철도로 갈아타야 한다. 나폴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중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범죄가 많은 곳으로도 악명이 높아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돌아다니기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도시이다. 만일의 경우 기동성이라도 있어야 하니 무거운 여행가방은 로마의 호텔에 두고 폼페이와 나폴리의 핵심 관광지만 둘러보고 저녁에 로마로 돌아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오전 9시 45분 나폴리 행 기차에 오르고 한 칸 남은 유레일 패스의 날짜란에 '10'을 눌러썼다. 막 생긴 파란 볼펜 선을 따라 시선이 한 번 더 머문다. 20여 일... 길 위에서 보낼 시간도 얼마 안 남았다. 1시간 반 만에 도착한 나폴리 기차역은 아들이 여행 내내 손에 꼭 쥐고 다니는 유럽여행 안내서의 설명과 달리 규모가 작아 보였다. 지방철도 환승 통로라던 지하계단을 찾을 수가 없어 지나가는 역무원에게 물었더니 2번 플랫폼에서 폼페이행 기차가 온다고 했다.

'뭔가 잘못된 건가?'

플랫폼 위를 왔다 갔다... 기차가 들어온다.


문이 열리고 플랫폼에 선 채로 승객들을 향해 폼페이로 가는 기차냐고 큰 소리로 물었다. 핸드백을 무릎 위에 두고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데, 손잡이에 기대 서 있던 젊은 남성은 좌우로 두 번.

'이런, 간다는 거야, 안 간다는 거야?'

잠시 망설이다가 기차 문이 닫힐까 봐 일단 올라탔다. 진달래빛 와이셔츠를 입은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객차 끝에서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 자기가 가르쳐줄 테니 집중해서 잘 들으라며 벽에 붙은 노선도를 가리켰다. 이번에 정차할 역은 Compi Flegrei이고 폼페이로 가는 기차는 Piazza Garibaldi역에서 탈 수 있다고 영어로 설명해 주고는 얼굴 가득 갈색 주름을 만들며 작별의 미소를 남기고 다음 역에서 하차했다.


그가 내린 다음에도 나는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듯 노선도에 바짝 다가섰다. 책에는 분명히 나폴리에 도착하면 해당 역에서 지방철도로 바로 갈아탈 수 있다고 했는데 무려 6 정거장을 왜 더 가라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가 탄 기차는 서울의 국철 같은 지상철이었고 역에 정차할 때마다 5분 동안 문을 활짝 연 채 승객을 기다렸다. 나처럼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창문 한 번 내다보고 한숨 한 번 내쉰다.


그가 내리라고 가르쳐 준 역은 규모가 아주 커 보였다. 중앙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 지방철도 Circumvesuviana역 입구에서 표를 구매해 폼페이행 기차를 탔다. 다양한 국적의 승객들 틈에서 노선도를 또 올려다봤다. Pompei는 앞으로 10 정거장, 40분 소요. 우리가 탄 객차가 맨 끝이라 기관실이 유리문 너머로 보였다. 유니폼을 입은 젊은 남자가 청회색 기계 스위치들에 둘러싸인 좁은 공간에 앉아 밀려드는 승객들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작지만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반대편 끝에 달린 또 다른 기관실의 누군가에게 기차를 맡기고 종착역이 다시 출발역이 될 때까지 휴식 중인가 보다.


바다를 닮은 이탈리아 남자가 홀로 앉은 좌석에 우리도 털썩. 둘째가 창가 자리를 먼저 점령하고 아들은 그 아저씨 옆에 앉았다. 그는 자신과 무릎을 맞대고 앉은 동양 여자 아이를 지긋히 바라봤다. 둘째도 뭔가 궁금한 게 있는 듯 앞으로 몸을 기울여 그를 빤히 올려다본다. 그가 먼저 딸의 손가락을 가리키며 살색 밴드는 왜 붙였냐고 나직이 물었다. 성당에서 촛불에 데었다고 하자 그는 팔짱을 낀 채 바다 수면 위에서 반짝이는 햇빛 같은 눈빛으로 웃었다.


아이들은 성당을 방문할 때마다 높이 1cm에 지름 4cm 크기의 납작한 둥근 양철 받침에 담긴 하얀 초에 불을 부쳐 수십 개의 촛불들이 깜박이는 계단식 제단 위에 올려놓고 성당에서 불교식 기도를 하며 열심히 소원을 빌었더랬다. 피렌체의 한 성당에서 둘째가 혼자 할 수 있다며 초에다 불을 붙이려다 가느다란 심지 대신 손가락을 일렁이는 파란 불꽃에 넣어 버렸다. 그날 오후 내내 얼음이 든 생수병을 벌건 중지가 얼어붙을 정도로 들고 다녀야 했다.


이번엔 꼬마 아가씨 차례. 내 귀에다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저 아저씨 머리를 묶은 거예요?"  

좌석 하나론 모자랄 만큼 큰 어깨를 가진 어른이 조그만 꽁지머리를 달고 있는 게 이상해서 쳐다본 것이었다. 그가 귓속말의 내용이 뭐냐고 체스처로 나에게 물었다. 자신의 머리 모양에 대한 질문이었다는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숙여 한 손을 이마에 올리더니 연갈색 머리카락의 결을 따라 뒤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뜨거운 정오 무렵 폼페이에 도착하다 보니 유적지를 꼼꼼히 돌아볼 학구적인 열의가 생기질 않았다. 회갈색 건물 대부분은 뼈대만 남았고 대문이 열려있는 가옥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샌들을 질질 끌며 반원형 극장까지 갔다가 제우스 신전을 돌아 나와 그늘이 드리운 작은 카페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우리는 다시 나폴리행 기차를 탔다.


Piazza Garibaldi역에 돌아와 시내지도를 얻으려 매표소에 들렀더니 초록색 사리를 입은 인도 여성이 절박한 표정을 하고 직원과 얘기 중이었다. 어제 이 역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경찰에 신고를 해달라고 직원에게 부탁했다. 직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이탈리아어로 몇 마디 통화를 한 다음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소매치기당한 물건을 찾는 건 불가능하니 단념하라고 말했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Piazza Cavour)을 이동해 국립 고고학 박물관(Museo Archeologico Nazionale di Napoli)으로 가는 길, 비가 제법 내렸다. 폼페이 유적지가 겉껍질이라면 이 박물관은 그 속살과 같다. 유적지에서 우리가 지나친 대문 너머의 정원과 실내를 채웠을 화려한 벽화, 도자기, 각종 생활 도구들은 현대에 제작된 앤티크 인테리어 소품이라 해도 믿을 만큼 완벽한 형태였다. 초등생이 보기엔 아주 민망한 선정적인 타일과 벽화들도 있지만 이곳의 전시품들보다 더 정확하게 당시 폼페이 사람들의 가치관과 생활수준, 화산 폭발 당시 상황을 묘사할 수 있는 글은 없어 보였다.


벌써 오후 4시. 비는 이미 그쳤지만 물 웅덩이들이 보인다. 필요 없게 된 우산을 배낭에 넣고 지도를 꺼냈다. 박물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몇 걸음을 옮기니 남쪽과 북쪽으로 아스팔트 길이 나눠졌다. 북쪽 언덕길엔 엘모 성(Castel Sant' Elmo)이란 이정표가 있는데 남쪽 길엔 아무것도 없다.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가도 푸니쿨라를 탈 만한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도로 양쪽으로 허름한 이삼층 집들이 담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절벽으로 둘러싸인 계곡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성에 가려면 케이블카와 지하철을 합쳐놓은 독특한 교통수단인 푸니쿨라를 꼭 타야 한다.

'Via Pessini 거리의 단테 광장(Piazza Dante)에서 골목 안으로 5분 거리에 있다고 했는데... 저 모퉁이를 돌아서 이정표가 없으면 돌아가야겠다.'

C자로 굽은 길 끝에 'Sant' Elmo''라는 굵은 글자와 화살표만 시야에 들어오고 푸니쿨라와 인접해 있다는 광장은 보이질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열린 창문마다 축 늘어진 빨래들만 운동회날 만국기처럼 저만치 위에서 우리 셋을 내려다본다.


은목걸이를 파는 조그만 가게의 문이 열려 있어 푸니쿨라 탑승지를 물었더니 여주인이 쪽지에 이탤릭체로 두 단어를 써주며 그 글자가 쓰인 이정표가 보일 때까지 계속 내려가란다. 갈림길에서 담소 중인 노인 세 분을 만나 지도를 보여주며 이곳에 가야 한다고 했더니 자신들은 글자를 읽을 줄 모른단다!

"푸니쿨라!"

소리를 질렀더니 동시에

"아하~!".

그들 중 한 분이 내리막길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간도 없는데 이 황량한 달동네에서 애들을 데리고 헤매고 있다니...'

그때 뒤에서 동생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따라오던 큰애가

"엄마, 엄마 신발에 방금 개똥 묻었어요!"

"괜찮아!"

신발 밑창이 아니라 맨발로 뭉갰데도 지금 그게 대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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