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sa 8.7, 2007
첫 유럽여행 계획을 세우던 중 애들에게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피사의 사탑(Torre Pendente)이란 답을 듣고 머리가 좀 복잡해졌다.
'기울어진 종탑 하나를 보자고 피사에서 1박을 해야 하나? 피사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가... 피렌체라. 기차가 다닐까? 여행 책자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데... 기차로 왕복 3시간. 오전 9시부터 40분 간격으로 탑에 오를 수 있다? 그럼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피사에 갔다가 점심 무렵에 피렌체로 돌아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가면 되겠네.'
7일 아침 8시 매표소 직원에게 피사로 가는 성인 1명, 12세 이하 아동 2명의 왕복 기차표를 구입하겠다고 했더니 유레일 패스의 소지 여부를 묻는다. 런던부터 지금까지 허리에 바싹 동여맨 하얀 힙쌕의 검은 지퍼를 열고 여권과 함께 고이 모셔둔 유레일 패스를 그에게 건넸다. 날짜와 인원수를 확인하고 바로 돌려주면서 국철에 올라 승무원에게 이 패스를 보여주면 된단다.
'맞다! 고속철뿐만 아니라 국철도 유레일 패스로 사용기간 안에선 횟수에 제한 없이 탈 수 있다고 했지. Wait a sec. 좌석지정은 어쩌고?'
빈자리 아무 데나 앉아 가랜다. 외국을 여행할 땐 우리나라와 다른 관행들 때문에 당황할 때가 많다. 기차표나 공연 티켓에 지정된 좌석 번호가 없으면 선착순이다.
반대로 박물관 관람료와 대중교통 이용료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동의 나이(단, 생일 기준 만 나이)에 따라 무료 또는 성인요금의 50-80% 정도를 지불하게 된다. 나라마다 또 도시에 따라 할인율에 차이가 많았다.
"I'd like to have tickets for one adult and two kids."
라고 했더니
"How old are the(your) kids?"
란 질문이 반드시 돌아왔다. 어느새 매표소 앞에 서면 자동으로,
"Three tickets for one adult and two kids under twelve, please."
공식적인 나이 확인을 위해 학생증이나 여권을 보여 달라고 하는 곳도 많다. 관람료와 교통비 외에 호텔 조식도 아이들의 나이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2015년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방문한 독일에선 만 16세 청소년까지 공짜 조식을 제공하는 후덕한 호텔들이 있었다.
사탑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다국적 관광객과 피사 시민들로 붐볐다. 당시 서울에서 볼 수 없던 양문형 버스 하차문을 처음 본 둘째가 문에 달린 노란 체인을 만져 보려고 다가갔다. 통로를 가득 채운 어른들 사이에서 큰애의 손에 좌석 손잡이를 쥐어주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등을 노크하듯이 톡톡. 뒤를 돌아보니 짧은 갈색 곱슬머리에 깊은 눈빛을 가진 할머니가 내 딸의 손을 잡고 나를 올려다본다.
"이 아이 엄만가요?"
"Yes?"
"얘가 버스 문이 열리는데 그 뒤에 서 있는 바람에 문에 끼일 뻔했어요. 내가 얼른 팔을 잡고 뒤로 빼냈지. 근데 닫히는 유리문에 얼굴이 스쳤나 봐요. 여기가 빨개졌어."
할머니는 둘째의 볼록한 볼에 자리 잡은 빨간 자국을 굽은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부심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It seems to be okay, Madam. Thank you for saving her!"
환히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아이의 얼굴이 부어오른 건 아닌지 한번 더 살펴보시며,
"아가야, 버스에선 문 앞에 서 있으면 다칠 수 있으니 가까이 가면 안돼. 알았지?"
"Don't worry. I'll be with her on a bus. Grazie, grazie!"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다시 문이 열리고 할머니는 보도에 내려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드셨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스르르 90도로 접혀있던 문이 다시 반듯하게 닫히자 이번엔 젊은 남자의 소심한 목소리가 오른쪽 얼굴에 닿는 공기를 가른다.
"Excuse me."
영화 <About Time>의 남자 주인공처럼 생긴 키가 큰 청년이 나에게 묻는다.
"Do you know how many stops to the Tower ofPisa?"
"I have no idea, sorry."
실망한 듯 보이는 그에게 나의 왼쪽에 서 있던 다른 청년이 말한다.
"It's the next stop."
앞 뒤로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할머니와의 대화 상황을 다시 되돌려봤다.
'할머니의 빠른 이탈리아어가 어떻게 한국말 더빙처럼 우리말로 들린 거지?'
몸동작과 얼굴 표정이 만든 착각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친구에게 그 할머니와의 이상한 대화를 얘기했더니,
"나도 그런 적 있어. LA 근처 해변에서 우리 애들이 모래성을 쌓고 있는데 옆에서 놀던 백인 꼬마가 모래 파는 걸 도와주며 같이 놀았지. 그 애 엄마는 영어로 나는 한국말로 1시간 동안 대화했어."
종탑은 많다. 하지만 기울어져 있다는 독특함과 유명한 과학자 갈릴레오의 이야기를 간직했다는 구체성이 평범한 작은 도시의 종탑으로 전 세계 관광객들을 끌어들인다. 매일 집을 나서면 지하철, 식당, 직장, 학교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내가 속하지 않은 나라에서 다른 언어로 사고하는 사람과의 짧지만 강렬한 조우는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칠 수 없는 신비로운 감성을 체험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