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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 Seeker Aug 15. 2016

아이 둘 데리고 유럽으로-6

Firenze 8.6-8.8, 2007

Firenze 8.6-8.8, 2007


이탈리아의 기차는 기차표에 명시된 출도착 시각에 기차역에 나타나는 일이 드물다. 20-30분 연착은 늘 있는 일이며 파리, 제네바와 다르게 국경을 넘어온 승객들에 대한 여권 확인 절차도 밀라노역에선 경험할 수 없었다. 오후 2:10 도착 예정이었던 기차는 30분이 되어서야 피렌체 중앙역(Staz. Centrale F. M. N)에 우리를 내려줬다.


역을 나와 가장 가까운 버스 정거장에 정차해 있는 버스로 다가갔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기사에게 두오모로 가는 버스가 몇 번이냐고 묻자 망설임 없이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벌떡 일어나 앞문의 계단을 내려와 내 앞에 서더니

"저쪽에 가서 7번이나 26번을 타요."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기사분의 과다 친절에 갈 길 바쁜 승객들에게 민폐를 끼친 것 같은 미안함을 느끼는 동시에 기차가 예정된 스케줄대로 운행되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버스로 두 정거장,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l Fiore) 성당의 아련한 붉은색 두오모(Duomo)가 보인다. 2년 전 겨울, 이틀 동안 씻고 밥 먹고 자는 현실을 내팽개치게 만들었던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의 주요 배경으로 두오모를 알게 되었다. 딱히 좋을 것도 싫은 것도 없이 그냥저냥 살아가는 날들이 반복되면 마음에도 굳은살이 박힌다.

'좋네. 좀 그러네. 괜찮은데.'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당함' 속에 모노톤이던 내 안의 감정들이 소설 속 젊은 연인의 풋풋함, 오해, 그리움을 따라가며 연두, 주황, 청보라로  되살아났다.


준세이와 아오이가 만나기로 약속했던 두오모의 전망대 쿠폴라에 우리도 해질 무렵 올랐다. 굴처럼 좁은 300개의 계단은 한 사람씩 줄지어 올라가야 한다. 조명도 변변한 창도 없는 어두운 계단은 더운 날씨에 좁은 공간에 응축된 땀냄새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신선한 바깥공기를 코끝이 감지하고 다 왔나 보다 안도하며 작은 문을 나오자 둥근 성당 천정에 설치된 난간 위. 머리 위로 선명하게 보이는 '최후의 심판' 천정 벽화를 뒤로하고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라 쿠폴라 위에 섰다. 박하사탕처럼 개운하고 달달한 바람이

"수고했어"

양볼에 흐르는 땀을 가져간다.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석양이 드리운 피렌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르노 강 위의 올록볼록한 다리들, 다빈치와 갈릴레이의 흔적을 간직한 산타 크로체 성당(Chiesa di Santa Croce)의 하얀 외벽, 베끼오 궁전(Palazzo Vecchio)의 높은 종탑과 멀리 도시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낮은 산들을 바라보며 중세 이탈리아를 느끼고 있을 때 10명 남짓한 대학생들의 대화 소리에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아, 배고파!"

"어이 식신아, 이 좋은 경치에 배고프단 소리밖에 안 나와?"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을 거야?"

"설거지 당번 누구야?"

"낚서한 거 죄다 한국사람들이네!"

"너도 아까 하는 거 내가 다 봤어."

우리 애들은 더위와 피곤에 꿀처럼 흘러내리는 그들의 말투에 귀를 세우고 들으며 서로 레몬에이드 같은 웃음을 나눈다. 작은 애가 나에게 다가와

"호텔에서 설거지를 왜 해요?"

라고 묻길래 저 청춘들은 돈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비싼 호텔에서 자는 것이 아니라 유스 호스텔에서 밥을 해 먹는 것이며 너희들도 저만큼 커서 친구들과 배낭여행을 가면 저렇게 다녀야 한다고 대답했다. 우리 아이들은 사랑을 맹세하는 연인들의 낭만적인 낚서에 둘러싸여 현실적인 인생 공부를 하고 쿠폴라를 내려왔다.


피렌체에선 두오모 외에도 미켈란 젤로가 만든 다비드상이 전시된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ademia)과 '비너스 탄생'을 소장한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i Uffizi)에 들어가기 위해선 오랜 시간 줄 서기를 감수해야 한다. 다리는 아프지만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 사이에 끼여 그들을 구경하는 것도 여행의 재미 중 하나다. 다비드를 보려고 좁은 길 위에 50여 명이 늘어선 가운데 내 앞에 선 이지적인 표정의 백인 남자는 5분에 한번 시계를 가리키며 그냥 가자하고 햇빛에 붉게 탄 피부의 금발 여자는 그래도 보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어깨를 으쓱한다. 내 뒤에 십 대 자녀를 포함한 4명의 가족은 근처 맥도널드에서 간식을 잔뜩 사들고 온 아빠를 반기며 하이파이브. 우리 애들은 그늘진 건너편 보도블록에 나란히 앉아 턱을 괘고

"우리 엄마 아직도 저기야?!"



높은 돔형 천정 아래 아무런 장식 없는 흰 벽을 배경으로 홀로 서 있는 다비드는 몇 시간을 기다려서라도 꼭 느껴봐야 한다. 5미터가 넘는 그의 키는 사진으로 보았던 미소년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발아래 다가가 올려다보았다. 화난 눈을 부릎뜨고 어딘가를 매섭게 노려보며 서있는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조각상 아래를 탑돌이 하듯이 돌고 또 돌고... 팔뚝의 선명한 핏줄과 숨 쉬는 듯한 근육들은 금방이라도 어깨에 맨 새총을 힘껏 앞으로 당길 것만 같았다. 다비드가 이러한 표정과 포즈를 취하게 된 건 정치적 의도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베니스와 라이벌이던 피렌체는 소도시이지만 강력한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다비드상을 제작하여 베끼오 궁전 앞에 세워 두었단다. 현재는 모조품이 그 자리에 대신 서서 관광객들의 기념사진 모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진품이 가진 강력한 아우라는 찾아볼 수 없다.


피렌체는 거리 곳곳에서 만난 현지인들의 여유로움으로 기억되는 도시이다. 골목을 다니다 보면 특이한 물건들을 파는 수공품 가게들이 많아서 호기심을 품고 들어가게 된다. 산타 크로체 성당에서 우피치 미술관 방향의 골목엔 가죽 가방과 재킷을 파는 가게들을 지나게 된다. 다른 골목엔 나무로 만든 비행기와 시계, 실물 크기의 자동차가 가게 중앙을 차지한 피노키오 할아버지의 가게도 있다. 베끼오 다리 근처 조그만 문방구에선 옛날 방식대로 만든 금박 표지의 다이어리와 필기구를 살 수 있다. 날렵한 외모의 가죽 가게 주인은 어디서 왔냐고 먼저 묻더니 멀리서 왔으니 가죽 팔찌 가격에서 1유로는 깎아준다며 장난기 섞인 윙크를 애들에게 날렸다. 돋보기안경을 낀 문방구 여주인은 둘째가 고른 무대 모형 값으로 동전이 모자라 지폐를 한 장 더 내밀자 괜찮다며 몇 센트를 깎아준다.


로마로 향하는 8일 아침 기차역에 걸어가는 도중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역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자 어느새 역 천정을 뚫고 들어올 것처럼 번개와 천둥이 번갈아 치더니 플랫폼들 위로 하늘을 가린 검은 콘크리트 판 양쪽으로 회색 비가 쏟아져 내리며 은빛 물보라가 피어오른다. 기차를 기다리며 플랫폼에 서 있던 남녀는 실크 커튼처럼 드리워진 물줄기 속을 빠져나오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천둥이

"바방!"

 칠 때마다 역사 안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남자들까지

"으흐으!"

시원스레 떨어지는 빗소리에 걸맞지 않은 소심한 비명소리가 웃겨서 우리 셋은 빵 터져버렸다. 어디에서도 다시 마주할 수 없을 특별한 장면을 내가 떠나는 순간 연출한 이 도시가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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