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nezia 8.4-8.6, 2007
도착할 때가 됐는데... 잠깐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 고개를 들었다. 차창 너머 조금 전까지 휙휙 스치던 밋밋한 집들과 들판은 사라지고 난데없이 민트빛 바다 위에 수없이 많은 원통 모양의 나무 기둥들이 수면 위로 얼굴만 내밀고 기차를 향해 일제히 인사를 한다.
베니치아는 로마제국의 멸망을 초래한 훈족(the Hune)의 추격을 피해 이곳까지 쫓겨온 이탈리아인들이 생존을 위해 바다 위에 하늘의 별처럼 많은 말뚝을 박고 섬 위에 건설한 도시라고 한다. 베네치아를 방문하고 가장 놀랐던 건 서양 근대 역사와 예술 영역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도시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초라할 수도 있었던 지리적 현실을 극복하고 어떻게 베네치아는 무역으로 유럽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두깔레 궁전(Palazzo Ducale)을 둘러보다 마주한 세계 지도안에 그 답이 있었다. 2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 양쪽 벽면을 가득 채운 오래된 지도는 유럽은 물론 아시아, 아메리카, 북극해까지 상세히 보여준다. 우리가 가진 땅의 물리적 크기가 우리의 삶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사고의 크기가 한계를 규정하는 거라고 지도가 말했다.
소박한 Venezia S.L역을 나오자 4차선의 도로 위를 오가는 자동차와 버스 대신 동서를 가르는 대운하 위로 크고 작은 배들이 보인다. 지나치는 행인과 어깨가 스칠 만큼 좁은 골목들과 모세혈관처럼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물길들 위에 걸쳐진 짧은 다리들로 이루어져 자동차는 무용지물이고 자전거도 흔치 않다. 따라서 수상버스는 요금이 비싼 편이지만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찼다. 베네치아를 떠나는 날 우리가 탄 수상버스 옆으로 하얀 드레스와 검은 턱시도를 입은 동양인 커플을 실은 멋진 배가 지나갔다. 짐가방과 사람이 한데 엉켜 중심 잡고 서 있기도 힘든 상황에서 배안의 승객들과 검은 선글라스를 낀 승무원은 일제히 박수와 환호로 신랑과 신부를 축하해 주었다.
두깔레 궁전 옆에 위치한 산 마르코 성당(Basilica di San Marco)은 터키에서 빼앗은 4마리 청동 말 조각상으로 유명하다. 원래 정문 위를 장식했던 청동상들을 나폴레옹이 전리품으로 프랑스로 가져갔었는데 반환받은 후 성당 2층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전생에 그 말들이랑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큰애가 그 말들을 꼭 봐야 한다길래 한참을 줄을 서 성당 입구에 다다랐건만 보안요원이 내 복장상태를 쓱 훑더니 '불량'해서 입장 불가란다. 날씨가 더워 반바지를 입은 게 뭐가 문제인가! 허나 유럽의 성당들이 민소매와 무릎이 보이는 짧은 하의를 입은 사람은 출입을 제한한다는 사실을 '날씨 때문에' 깜박했다. 광장을 가로질러 한 블록 뒤에 있던 호텔로 돌아가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따가운 햇볕 아래 늘어선 사람들 틈에 섰다. 광장을 날아다니는 비둘기에게 화풀이하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 먹을래?"
성당 좌측에 산마르코 광장에서 가장 높은 종탑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7미터 높이를 계단으로 오르는 수고를 피할 수 있다. 종탑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누구나 전문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사진을 얻을 수 있는 완벽한 구도를 제공한다. 지중해 특유의 초록과 파랑을 적절히 섞어 놓은 바다 색깔을 배경으로 리도섬과 작은 이름 모를 섬들 위에 예쁜 붉은 집들이 패턴을 만들고, 공간의 역동성을 살리는 배들이 물결의 여운을 그린다. 이제껏 잘 들고 다니던 카메라를 왜 보관소에 맡기고 올라왔을까?
쓰린 속을 달래며 걸음을 옮기다 하늘색 공중전화를 발견했다. 이리도 높은 종탑 위에 공중전화라... 가까이 다가가 수화기를 들고 서울에 전화를 걸었다. 애들 먼저 아빠와 통화를 하고 나를 바꿔준다.
"과앙~대앵~"
갑자기 머리 위에서 커다란 종들이 세차게 파도처럼 흔들리고 수화기를 든 나는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움찔 머리를 숙였다. 거대한 청동빛 종들이 머리 위에서 서로 다른 음을 만들며 합창을 하는 동안 관광객들은 모두 귀를 두 손으로 가리고 최대한 낮게 몸을 웅크렸다. 바다만큼 시원한 그 울림이 너무나 좋아 깔깔거리며
"종소리야. 전화 끊지 말고 들어요!"
수화기에다 큰소리로 내질렀다. 사진은 못 건졌지만 이국의 종소리를 전화로 생중계하는 행운을 가질 줄이야. Life is unpredictable!
베네치아는 지리적 여건과 관광지라는 이유로 다른 곳보다 물가가 비싸서 생수 한 병의 무게마저 다르게 느껴진다. 샌드위치 가게에서 만난 한국 대학생 세 명이 테이블에 앉아서 먹고 갈 것이냐, 가면서 먹을 것이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잔돈을 지갑에 넣으며 그들 대화에 끼어들 틈을 살폈다.
"먹고 가면 테이블 사용료를 얹어 샌드위치 값이 두배가 돼요."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바로 상황 종료. 알려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꾸벅한 뒤 샌드위치를 사들고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갔다.
아카데미아 미술관 (Galleria dell'Accademia)이 보수공사 중이라 내부를 둘러볼 수 없어 아카테미아 목조 다리를 건너 골목길을 배회하다 우측에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탁 트인 길에 들어섰다. 일렁이는 바닷물 건너편에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Santa Maria della Salute) 전면의 펼쳐진 부채 같은 계단 위에 눕거나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덩달아 한가로이 걷고 있는데 갑자기 파도가 솟구쳐 오르더니 다리를 덮치며 철썩!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지를 내려다보며 바다에 항의라도 하듯 꼼짝 앉고 서 있었다.
"쓰나미를 만났군! 하하하!"
몸을 돌려 오던 길을 바라보니 키를 넘는 기다란 낚싯대를 한쪽 어깨에 걸친 노인이 풍성한 턱수염을 파도 거품처럼 하얗게 휘날리며 나를 지나쳐 간다. 앞서 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고소해하던 그의 웃음소리에 취해 한동안 나는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