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7.28-8.2, 2007
영국해협(the Channel)을 가로질러 구대륙에 다다른 기차는 파리 북역(Gare de Nord)에 멈추기 전까지 단조로운 평지와 낮은 구릉들을 통과했다. 플랫폼에 내리자 뭐라는지 해독 불가인 불어 안내방송이 광장처럼 넓은 역사에 울려 퍼지며 우리가 프랑스에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뒤이어 맨트가 끝난 여백을 채우는 단조의 음악이 왠지 모르게 나를 긴장시켰다.
처음 방문한 장소에서 현재 위치를 깜박깜박 파란 점으로 알려주는 스마트폰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인 2007년에 루브르 박물관(Musee Du Louvre) 북쪽으로 세 블록쯤 좁은 골목 안에 숨어있던 호텔을 찾아가는 건 impossible mission에 가까웠다. 영어로 길을 물으니 불어로 대답해준다! 자타공인 인간 내비게이션인 나에게 거미줄처럼 연결된 파리의 골목길은 당황스러움을 넘어 황당하기까지...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면 사방이 노란 건물벽으로 둘러싸인 휑한 공터 중앙에 난데없이 오벨리스크가 버티고 서있다. 요즘은 해외에서도 지도 앱으로 길 찾기가 수월해져서 아날로그 시대처럼 헤매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온몸의 세포가 예리하게 살아나던 그 차가운 긴장감을 다시 느낄 기회가 사라진건 아쉬움 이상의 뭔가를 남긴다.
그렇게 미로 같은 골목길을 배회하던 와중에 대학생처럼 보이는 두 명의 청년들을 발견했다. 우리네 슈퍼에서 볼 수 있는 네모난 아이스크림 보관용 냉장고에 한 명은 머리를 디밀고 있고 다른 이는 봉지를 뜯고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고 있는 게 보였다. 파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광경이라기엔 뭔가 언발란스했지만 가까이 가니 한글로 간판까지 있다! 주인에게 주소를 보여주고 도움을 청했다. 애들은 익숙한 '돼지바'와 '메로나'를 파리 뒷골목에서 팔다니 신기하다고 눈이 동그래져서 재잘거린다. 반면에 나는 두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는 인도의 좁아터짐에 놀라고 21세기에 아직도 이렇게 살 수 있는 파리 시민들의 인내심에 감탄했다.
호텔이 내 눈앞에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며 모퉁이를 돌았더니 'Malte Opera Hotel'이란 글자들이 반갑게 zoom in! 안으로 들어가니 호텔이라기보다 개인집 같은 분위기로 아늑하고 조용하다. 두 명이 바짝 붙어서야 하는 좁은 엘리베이터의 밀고 닫는 수동식 문에 우리 애들은 또 한 번
"와~신기하다!"
그 후로 영화를 보다가 또는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특이한 엘리베이터를 볼 때마다 파리 호텔의 승강기와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빠, 그 파리 호텔 엘리베이터 생각나?"
이렇게 시작해서 상세한 그때의 정황들과 느꼈던 감정들을 되살리며 까르륵, 키득키득...
고등학교 시절 고전부터 추상화까지 서양화를 주제로 한 MBC 다큐 프로그램에서 명화들이 소장된 런던, 파리, 피렌체, 바티칸의 미술관들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상당히 긴 시리즈물을 매주 늦은 밤 시청하며 언젠가는 미켈란젤로부터 피카소까지 유명화가들의 그림 순례를 위해 유럽을 가리라! 그 꿈이 현실이 되는데 20년이 걸렸지만 아이들과 내 어린 시절 소망했던 미래의 한 순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었다.
'내 꿈도 언젠가 엄마 꿈처럼 이루어질 거야.'
아마 첫째도 둘째도 3주 동안 나의 꿈속을 거닐며 마음속으로 그렇게 주문을 외웠으리라!
높은 파운드 환율과 타국의 문화재 약탈에 대한 비난을 의식해 런던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무료이나 파리는 이웃나라의 관대한 인심에 눈치 보지 않고 유료이기 때문에 박물관 패스를 구입하면 돈도 절약하고 매표소에서 티켓 구입을 위해 다리 아프게 몇 시간씩 기다리는 고생도 피할 수 있다. 따라서 로뎅 미술관처럼 방문객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곳을 박물관과 미술관 투어의 첫 방문지로 선택해 패스를 구입하면 여러모로 편리하다. 또한 유럽의 박물관들은 어린이를 동반한 방문객은 긴 줄에 서 있을 필요 없이 우선 입장시켜주는 곳이 많다. 실례로 오르세 미술관 입구에서 'ㄹ'자 모양으로 길게 늘어선 줄 꼬리에 서자마자 유니폼을 입은 남자 직원이 다가와 맞은편 입구를 가리키며 바로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루브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모나리자나 비너스처럼 유명한 예술품들이 아니라 미술 교과서에서 보던 그림들을 바라보며 스케치를 하던 20명 정도의 일본인들이었다. 스케치북, 목탄, 이젤은 박물관측이 항상 구비하고 있다고 했다. 2015년 8월 다시 방문한 런던의 National Gallery에서도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네 명의 금발머리 여자아이들이 드가의 발레리나와 램브란트의 초상화를 올려다보며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 보고 옛 친구를 우연히 만난 듯 혼자 미소 지었더랬다. 두 번의 에피소드는 늘 한 가지 생각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한가람미술관, 시립미술관, 국립 박물관에선 이런 광경을 왜 한 번도 볼 수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