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va 8.2-8.3, 2007
런던에서 5일, 파리에서 5일, 이쯤 되면 여행도 한 템포 늦출 필요가 있다. 일상에서 주중에 일하고 주말에 쉬는 것처럼 장기간 여행할 때 '빨간 날'이 없으면 관광은 자칫 '일'이 되어버릴 수 있다. 앞으로 남은 일정 동안 아프지 않고 즐겁게 여행하려면 제네바에선 관광객의 의무에서 벗어나 하루를 쉬기로 했다. 더 많이 보기 위해 하루 일정을 새벽부터 밤까지 빡빡하게 채우고 야간기차로 이동하는 우리 젊은이들을 버스와 관광지에서 여러 번 만났지만 대화는커녕 눈 마주칠 기운도 없어 보였다. 물론 돈과 시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배낭여행이지만 여행에서 여유와 즐거움이 빠지면 애써 일상을 뒤로하고 멀리 떠난 목적이 사라진다. 길을 나서는 이유는 통념과 관습이란 화장을 벗은 민낯의 나를 마주하기 위해서다.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이동하는 방법은 비행기나 기차를 타는 것. 파리에서 제네바는 3시간, 제네바에서 밀라노는 4시간. 비행기보다 훨씬 긴 이동시간이 소요되지만 아이들은 멀미가 덜 나는 기차를 선택했다. 파리-제네바는 산 아래 이국적인 집들을 빼면 강원도와 흡사하다. 제네바-밀라노는 그림 같은 레만 호수를 따라 철길이 이어져 호수의 물빛과 산의 곡선, 다가왔다 멀어지는 중세의 성들이 차창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휴양 도시를 지날 때 기차 안의 승객들이 텔레파시라도 통한 건지 동시에 창을 향해 기자회견장처럼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아름다움은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제네바의 Cornavin역 바로 앞에 있는 Cornavin hotel에 들어서자 9층에서 라운지 바닥까지 거대한 시계추가 한쪽 벽을 차지하고 드리워져 있다. 넓은 모던한 객실에 짐을 놓아두고 제네바에서 유일한 공식 일정인 레만 호수의 유람선을 타러 가기 위해 호텔을 나와 남쪽의 번화가로 향했다. 양쪽에 늘어선 상점들의 진열장에 가득 찬 시계들의 숫자에 너무 과하다고 느끼며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자, 폭이 넓은 보도 위에 한 블록마다 거리의 조명등처럼 양쪽에 서 있는 동그란 시계들 때문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이렇게 사방이 시계로 둘러싸여 있으니 시계의 나라 스위스에선 정작 손목시계를 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돌아오는 길에 저녁으로 고기 퐁듀를 먹었다. 얇은 고기 조각을 긴 포크에 찍어 끓는 기름에 잠깐 담갔다가 꺼내어 소스에 찍어 먹는 요리인데 10살 난 아들이 성인 1인분을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으~ 배불러, 넘 많이 먹었네"
이러며 호텔 앞 지하상가를 지나가다 자석에 끌려가는 압정들처럼 우리 셋은 초콜릿 가게 유리창 너머로 벽돌만 한 초콜릿 덩어리를 보자마자 유리창에 코가 붙어버렸다. 곧장 들어가 파는 거냐고 앞치마 두른 점원에게 물으니 무게를 달아서 판단다! 이미 용량 초과로 드시지 않았냐고 항의하는 위장의 외침을 무시하고 갖가지 모양과 빛깔의 초콜릿과 사탕, 마시멜로, 젤리가 든 하얀 종이봉지를 들고 호텔 침대 위에서 봉투를 뜯는 순간을 기대하며 우리는 아주 신이 났다. 어떤 맛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