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공부전략-배경지식 기르기
우리나라 초등생들은 저학년부터 복잡한 영어문법과 한 학기를 초과한 수학 교육과정을 미리 예습하는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지만 두뇌의 추상적 논리력이 미숙한 상태라 실제로 학생들이 학원에서 배운 지식의 깊이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수학과 영어의 선행에 올인하는 대신에 국어의 어휘와 문장력을 키우고 국사, 세계사, 지리, 경제, 과학에 대한 배경지식을 키워야겠다는 좀 별난 '사교육' 목표를 세웠더랬습니다. 그렇다고 역사, 사회, 과학 학원에 아이들을 등록한 건 아니고 1-2주에 한 번 주말마다 우리 가족은 서점으로 책 쇼핑을 갔습니다. 학원비를 서점에 매 달 납입한 거죠. 외국 여행을 가서도 크고 작은 서점에 들러 여행 기념품으로 우리 아이들은 책을 구입합니다.
1-2학년 때는 서점에 갈 때마다 아이들에게 보고 싶은 책 3권을 고르라고 했습니다. 단 만화책은 제외하고요. 의문사로 시작하는 만화 시리즈로 역사와 과학 지식을 습득하는 학생들이 많지만 만화는 구어체의 짧은 문장으로 구성되어서 아이들이 긴 문어체의 문장들로 이루어진 지문을 접할 때 요구되는 집중력(작업 기억, working memory)을 만화로는 키울 수가 없습니다. 만화는 그림을 동반하기 때문에 긴 문장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 내용을 마음속으로 상상하는 능력(시각 이미지화, visualization)을 기르는 것도 방해합니다. 그러다 보니 만화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삽화가 없는 책을 읽는 것을 힘들어하고 지루하게 여겨 두꺼운 책과 멀어지게 됩니다.
책을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은 두 가지 교육적 효과가 있어요. 부모가 자신의 결정을 존중해 준다는 것을 경험한 아이는 자존감이 높아지고, 어떤 책이 여러 번 읽을 가치가 있는지 따져 보는 동안 책을 보는 안목이 길러집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책을 선별하는 능력을 갖추는 건 아니라서 2-3권으로 제한하고 부모가 보기에 유익한 책도 몇 권 골라서 읽어보라고 권하면 강제성을 띠지 않아도 책장을 넘기게 되더군요. 고학년이 되었을 땐 책을 선택하는 결정권을 아이들에게 완전히 넘겨주었습니다. 학교를 다녀와서 간식을 먹고 나면 아이들은 책상이나 소파에 앉아 2-3시간 동안 책을 읽었습니다. 친구들이 학원을 안 가면 집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자주 물어보더랍니다.
"책 보고 노는데."
"야, 책 보는 건 공부지 그게 노는 거냐!"
우리 아이들은 도리어 책 읽을 때가 자신들이 쉬는 시간인데 왜 학교 공부랑 같은 걸로 친구들이 생각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더군요.
독서를 통한 선행학습은 생각보다 많은 과목을 체계적으로 예습하도록 도와줍니다. 동화와 소설 같은 문학 책들과 비문학에 속하는 신문으로 어휘 실력을 늘리면 국어만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수능과 토플의 영어 독해에 나오는 'recognize(인식하다)', 'context(맥락)', 'radical(급진적인)'과 같은 추상적인 의미의 단어와 딱딱한 문어체 문장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덜 겪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말로 이러한 단어들의 의미를 모르는 학습자는 해당 단어를 외워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단어의 개념이 머리에 형성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또한 책을 읽는 행위는 작가의 논리 배열을 따라가는 것이니 다양한 작가의 비판적, 분석적인 사고 과정들을 배우게 되어 논술학원이나 스피치 학원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시나브로 논리 정연한 말과 글을 구사하게 됩니다.
또한 역사책은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 경제의 발전과정만이 아니라 특정 시대정신을 창조한 철학자들(eg. 데카르트의 기계론)과 그러한 철학적 신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과학원리를 도출한 과학자들(eg. 뉴턴의 광학 원리)의 학문적 업적도 언급하므로 사회 이념과 과학 이론이 어디서, 누구에 의해, 왜 생겨났는지에 대해 그 과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미술, 음악 사조의 시대 순서와 각 사조를 이끈 화가와 작곡가에 대해서도 접하게 되니 각 과목에 대한 세부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이점과 함께 모든 영역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걸 은연중에 깨닫게 됩니다.
역사책은 한권만 정독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작가들에 의해 서술된 한국사와 세계사 책들을 읽고 나면 작가의 관점에 따라 역사를 전개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비평적 시각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인도의 수상이었던 네루가 딸을 위해 집필한 <세계사 편력>은 이러한 사관의 차이를 잘 드러내 주는 역사책이라 할 수 있죠. 또한 <한국 속의 세계, 상. 하> 시리즈는 한국사와 세계사를 연결시킴으로써 다른 나라와의 유기적 관계에 의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변화를 겪는다는 점을 알게 합니다. 우리의 학교 시험과 대학 수능 시험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많이 기억하는지를 평가하지만 서양에서는 역사를 한쪽 사관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비교 분석하여 논하는 서술형 시험의 비중이 높습니다. 교과서를 좌/우의 관점으로 편찬하더라도 학생이 바라보는 비판력을 가져 역사적 사실과 그에 대한 평가에 대해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을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죠.
<전쟁의 물리학 >, <과학사 이야기>,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와 같은 역사서들은 과학이라는 주제를 심도 깊게 다루어 과학이 단순히 교과서에서 배우기를 강요받는 차가운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깊이 연관되어 있는 살아있는 지식임을 느끼게 해줍니다. <금융으로 본 세계사>와 <제국의 미래>는 현대 경제의 패러다임의 형성과정에 영향을 미친 정치, 지리, 무역, 민족, 돈의 흐름이라는 관계도를 읽는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따라서 모든 과목들은 시계 속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정교한 톱니바퀴들처럼 역사 과목을 핵심축으로 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해도 안 되는 수학 지식을 예습하는데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지 않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을 읽는 능력과 풍부한 어휘력, 논리적 사고력을 책으로 키웠던 우리 아이들은 한국, 호주, 영국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해 왔습니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초등학생이 길러야 하는 기본 학습능력에 대한 어른들의 생각에 변화가 생긴다면 아이들도 공부의 재미를 알게 되겠죠. 그러나,
"학원비는 아깝지 않은데 책 사는 돈은 아까워요."
아직 가야할 길이 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