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알게 되는 기도방법

침묵 속에서 처음으로 ‘듣는 법’을 배웠다

by Karin an


나는 오랫동안 기도를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일’로만 여겨왔다.
무언가를 간절히 빌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이 듣지 않으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성서백주간 봉사자 과정 교육에서
신부님의 한마디가 나를 멈춰 세웠다.


“기도는 말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그 순간 마음이 조용해졌다.
기도란 하느님께 내 말을 쏟아내는 독백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내 안에서 들려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늘 혼잣말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내가 원하는 것들만 쏟아내고 잠들던 날들의 반복이었다.


그날 밤, 십자가 앞에 앉아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들을 준비만 한 채로 한참을 머물렀다.
그러자 마음을 오랫동안 불안하게 만들던 질문 하나에
단어 하나가 조용히 떠올랐다.

그것이 하느님의 대답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분명 ‘듣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신부님은 덧붙이셨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해도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때부터 이단이 생깁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기도의 본질이 겸손이라면, 그 겸손은 ‘내가 들었다’는 확신조차 내려놓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흔히
번영을 주는 하느님,
악을 배척하는 하느님,
항상 나에게 좋은 일만 주는 하느님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런 신은 환상이다.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믿고 싶은 대로 믿고, 규칙만 지키는 것을 신앙이라 착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기실현이다.
하느님의 뜻을 내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비워 그분의 뜻이 머물 자리를 내어주는 일.

돌이켜보면, 세례와 견진성사를 거쳐
성서백주간을 함께한 지난 3년은
삶의 근원적인 질문들에
조금씩 형태를 부여해준 시간이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기도는 ‘내가 말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분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머무는 시간이라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내 삶을 ‘통제의 영역’ 안에 두고 살았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내가 예상하지 못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모든 것을 쳐부수듯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애썼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예고 없이 방향을 바꾼다.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고,
또 몇 년 뒤 뇌출혈로 쓰러지셨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삶’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때 나는 무너졌다.
삶이 내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정신마저 놓을 것 같았다.


그 절망의 끝에서야
비로소 ‘맡김’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온전히 내 힘으로는 다스릴 수 없는 순간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일.

신앙은 그때 내 안으로 들어왔다.


일요일마다 의무처럼 나가던 미사가 아닌,
삶 속에서 길을 잃은 나를
조용히 붙잡아주는 믿음으로 다가왔다.


성서백주간을 통해 나는
‘신앙이 내 삶을 이끌고,
삶이 신앙을 자라게 하는 순환’을 배워가고 있다.


그 믿음의 틀이 서자
사람에 대한 믿음도,
내 삶에 대한 믿음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이렇게 글로 쓰면
아주 간단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일 새로고침하듯
수십 번 마음을 다잡으며
몇 해를 건너온 과정이었다.


이번에 성서백주간 봉사자 교육을 받으며
나는 진정한 기도는 묵상 아래에서 나온다는 것을 배웠다.
듣는다는 것은 귀를 여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 그분의 숨결이 머무를 공간을 내어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들음을 동행한 기도’를 하고 난 아침은 놀라울 만큼 경쾌했다.


마치 하느님의 앞마당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강아지처럼 눈을 떴다.
“오늘은 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생각에 미소가 저절로 번졌다.


예전엔 하루를 버텨내거나 도대체 내 소원은 언제 이뤄주시나 했지만,
이제는 하루를 살아볼 기회로 여긴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떤가요?

원하는 소원만 말하고 돌아서진 않나요?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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