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구멍을 들여다보는 시간

내가 사들인 물건들, 그리고 보이지 않던 결핍

by Karin an

얼마 전, ‘소비의 조건’에 관한 책을 읽다가 문장이 하나 걸렸다.
대부분의 소비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와 결핍에서 비롯된다.

책장을 덮는 순간,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문득 집안을 둘러보았다.

서랍 속에 쌓여 있는 노트들,
내 자산의 고민을 해결해 줄 것 같았던 각종 경제 서적들.
예쁘기만 한데 나와 어울리지 않거나 사이즈가 안 맞아 쌓여있던 옷이나 신발들.


그 물건들이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를 가지면 네 문제를 해결해 줄 거야”
“이 부족함을 내가 메워줄게.”


그제야 나는 이해했다.


내가 사들였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내 결핍의 형태였다는 걸.

그 순간, 오래전에 보았던 애니메이션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바로 <센과 치히로>라는 애니메이션에서 ‘가오나시’.

끝없이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존재


가오나시는 가면을 쓰고 검은 천을 두른 캐릭터다.

요구하는 것을 정확히 언어로 말하지 못하는 이 캐릭터는

여자 주인공인 첸에게 다가가지 못하자

모든 것을 삼킨다.
수백 개의 음식을, 사람을, 금을, 관심을.
하지만 어느 것도 그를 채우지 못한다.


그의 허기는 음식의 부족이 아니라
정체성의 부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외부로 채우려는 노력은
결국 더 큰 공허를 만든다.
그 구조가 너무 익숙했다.


대상만 다를 뿐, 우리도 비슷한 방식으로 허기를 채우려 한다.

물건, 관계, 성취, 인정.
어쩌면 그 모든 시도는
“내 안의 빈틈을 보지 않으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결핍은 타인이 아니라 ‘내 안’에서 발생한다.


심리학은 결핍의 중심을 ‘애착’에서 설명한다.
내면의 안전 기반이 충분히 다져지지 않으면
사람은 안정감을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관계에서는 누군가를 붙잡으려 하고,
소비에서는 물건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그 방식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부족함을
아니마(남성의 내면 여성성),
아니무스(여성의 내면 남성성)에 투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은 흔히 자신의 반대 성질을 가진 상대에게 끌린다.

그 반대성은 마치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해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관계가 시작되면 말을 바꾼다.


“저 사람은 너무 나랑 달라.”
“나 같지 않아서 화난다.”


결핍으로 맺어진 인연은 늘 전쟁이다.

타인은 결코 자신의 구멍을 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숙하지 않은 사랑은 이렇게 말한다.


“내 결핍을 당신이 채워줘.”


그러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상대를 탓한다.


가오나시가 다른 이들을 집어삼켜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진정한 성숙은, 자신을 결핍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채우는 일이었다.


다시 집안을 바라보던 순간,
나는 ‘심플라이프’가 왜 중요한지 처음으로 이해했다.


물건을 버리는 일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내 결핍이 외부로 향하는 습관을 끊는 일이었다.


결핍을 직면하는 일.
그 공백을 비워두는 일.
그 여백 속에서 나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일.

마음의 구멍은
아무도 대신 채울 수 없다.

그 자리는 오직 나로만 채워진다.

내가 나를 단단히 채우기 시작할 때,
타인을 삼키지 않아도 되고
타인에게 삼켜지지도 않는다.


당신은 요즘 무엇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나요?

물건인가.
관계인가.
성취인가.
아니면 잠시 멈춰 서서,
그 공백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나요?

빈틈을 바라보는 용기가 생기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온전히 메꾸는 삶이 아닌
‘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게 되는지도 모른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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