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를 견디는 법

꽃으로는 무게를 버틸 수 없다.

by Karin an

무작정 서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두 차례 공연을 잘 진행하고,

앞으로도 함께 작업하기로 했던 언니가 갑작스러운 재혼과 임신 소식을 전했다.


[조금만 쉬다 금방 돌아올게.]


그 말은 오래지 않아 두 번째, 세 번째 연속 임신 소식으로 바뀌었다.

육아에 온전히 집중해야 하던 언니를 만나고 돌아오던 날마다

여자로서의 행복이 더 큰 타인의 삶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낭만의 예술은 끝났다.]


함께 얘기 나누며 구상했던

애쓰며 내가 꿈꿨던 작업은 이미 끝났다는 걸.
그 자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그들의 행복을 나는 축하해야 했다.
그건 분명 축복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축복의 그림자 속에서

많은 희망들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예술을 계속할 수 있는 희망이라 믿었던 프로젝트는 흐릿하게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메우며
나는 ‘예술교육사업’이라는 전혀 다른 길에 발을 들였다.


그건 선택이라기보다
그나마 남아 있던 단 하나의 길이었다.


엄마도 그 무렵 부산에서 홀로 서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전화로 자주 싸웠다.
돈 때문이었다.


엄마는 늘 말했다.


“여자가 무슨 큰 일을 하냐.
시집을 잘 가면 되지.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네가 덜 힘들 텐데…”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 말이 들릴 때마다
손바닥만 한 내 원룸은 더 작아졌다.


나는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세상 한복판에 던져진 것 같았다.


가끔은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아무나 잡고 결혼해 버리면
조금은 나아질까?
혼자가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막막함이 사라질까?]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내 주변엔 나처럼 불안정하고, 흔들리고,
세상과 엇박자를 내는 남자들뿐이었다.
오히려 그런 사람과 함께 있을수록 나는 더 고립되었다.


그 시절의 나는
녹록지 않은 ‘여자 혼자 사는 삶’에 대해 몇 번씩 다시 배웠다.


앞집 남자가 내 택배에 적힌 번호를 훔쳐
문 열 때마다 [어디 가요?] 문자를 보내던 일.

내가 사는 동네까지 일 핑계로 쫓아오던 중년의 지인분 까지 말이다.


겁이 났지만,
돈이 없어 이사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엄마의 나약함을 원망하던 내가
오히려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 세상도 이런데 옛날은 얼마나 더 했을까?]


여자 혼자 씩씩하게 산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조심해야지만 되는 일이 많아지는 것을 느끼자

예민함의 가시가 온몸에 돋는 것 같았다.


그것도 버거웠던 어느 날,
부산에서 데려온 고양이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위독해졌다.


병원비 60만 원.

30만 원이 모자랬는데
그 돈을 구할 수 없었다.


전화를 돌렸지만 돌아오는 말은 똑같았다.
“가까운 사이는 돈거래하면 안 돼.”


나는 300만 원을 빌려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30만 원이었다.
그러나 그 30만 원이 없어서

키우던 고양이가 아픈데 병원도 못 가는 신세이고,

30만 원 때문에 전화를 돌리고 있는 것이

30대 초반의 내 삶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숫자처럼 느껴졌다.


한 친구가 말했다.
“돈은 어렵지만, 라면이랑 만두는 보내줄게.”

나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그때 나는
라면보다 쌀이 더 필요했고,
만두보다 김치가 더 간절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건
너무도 부끄러웠다.


게다가 내 목구멍으론 무엇이 넘어간들

지금 상관없었다.


30만원.


나만 보고 사는 고양이에 대한 생명의 책임도 없는

서른이 넘은 나의 무능력함이 나를 다 터질 것 같았다.


매달 엄마에게 보내는 작은 돈도 버거운데,
적금 한 번 못 유지해 본 내 인생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30만원.


뒤늦게 병원을 갔을 땐 이미 그 녀석은 무지개를 건너게 되었다.




그 무렵, 결혼식 청첩장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초대장이었다.
생활비도 빠듯한데 누군가를 축하해 줄 돈도 없을뿐더러

누군가는 삶의 순서를 찾아 안정을 얻고,
나는 여전히 제자리인 게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돈이 없고 시간이 많으면

생각은 부정적으로 흐른다.

내 방구석의 공기는

늘 무거웠다.

나는 섬이 된 것 같다 생각을 자주 했다.


그래서 뛰쳐나가서 사람을 만나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력서를 되는 곳마다 다 뿌렸다.

하루는 20곳가까이 뿌리기도 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자 나는 또 다른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행사, 공연, 영상, 교육.
현실 속에서 발을 딛고 일하는
진짜 예술가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배웠다.
예술을 일과 생존으로 삼는다면, 예술이 감정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걸.


부산에서의 ‘예술’이 '낭만'이었다면,
서울의 '예술'은 ‘지속할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이었다.


주말도, 밤도 없는 삶이 시작되었다.
때로는 학교나 유치원에서,
때로는 복지관에서,

때로는 시청에서,
때로는 무대 위에서.
나는 여러 얼굴로 일하며 살아남았다.


거울 속의 나는 어느새
무채색 옷만 입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저 ‘일하는 인간’.

이제 돌아보면 그 시절의 나는,
가벼워지기보다 무거워지던 시간 속에 있었다.

꿈이라는 이름으로 떠 있던 몸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중력’을 배우던 때였다.

그건 추락이 아니라,
땅 위에 스스로 서는 방법, 살아남는 법이었다.


더 이상 꽃일 필요가 없는 날이 시작되었다.



젊을 땐 날아오르는 법만 배우지만,
어른이 된다는 건
떨어져도 부서지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나는 그때,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게 아니라
나를 붙잡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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