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서 시작된 중력

중력에 발목을 잡히다.

by Karin an

스물아홉의 여름,
그때의 나는 세상에 취해 있었다.

공연이 끝나면 늘 누군가의 술자리가 이어졌고,
그 술자리가 끝나면 또 다른 예술가들의 모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춤추던 사람, 그림 그리던 사람, 시를 쓰던 사람들.
모두들 세상이 자기 이야기로 가득하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는
‘열정’이라는 단어로 모든 피로를 덮어버리던 여자였다.

연습실의 땀 냄새, 새벽까지 이어진 이야기,
불 꺼진 극장의 먼지 냄새조차
젊음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축제 같던 삶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부산의 바다가 아무리 반짝여도
서울의 불빛을 보고 싶었다.

그건 동경이라기보다 탈출에 가까웠다.


누군가의 무대 속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서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안무가 육성사업’이라는 기회를 붙잡고,
스스로를 쫓듯 서울로 향했다.

부산의 수영강을 마지막으로 건너던 날,
나는 강물이 바다보다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속을 알 수 없는 흐린 색,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이.
그 물빛은 마치 사람의 마음 같았다.


그때 이미 나는
무언가로부터 떠나고 있었다.


부산에서의 마지막 계절은 유난히 거칠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고,
가족은 하루아침에 낯선 시골로 흩어졌다.
하루에 버스가 세 번밖에 다니지 않는 곳,
밤이면 고라니가 울고, 현관 앞엔 들짐승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나는 침몰하는 배에 탄 듯했다.
겨울바다처럼 거칠고 냉담한 현실 속에서
부산이 지긋지긋했다.
그건 도망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짐을 싸고, 차를 팔고,
엉엉 울면서 서울행 기차를 고양이들과 각종짐을 부여잡고 탔다.


그렇게 나는
무대 위의 여자가 아닌,
현실 속의 인간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서울의 겨울은 예상보다 더 차가웠다.
부산에서 가져온 이불은
그 도시의 밤을 견디기엔 너무 얇았다.


저렴히 구한 벽이 얇은 원룸에서
옆집의 코 고는 소리가 내 귓가로 스며들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위로 같았다.
나는 서울의 먼지 한 알처럼
공중에 떠 있었다.


그때 잠실에 사시던 부산에서 알던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다.


“서울 생활은 어때요?”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분도 내 말의 온도를 알고 계셨다.


“밥이랑 술 사줄게, 놀러 와요.”


그날 밤,
우리는 잔을 기울이며
서울의 삶이 얼마나 녹록지 않은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잔이 두 잔이 되고 세 잔이 되었을 때,

나는 그제야 ‘서울의 밤’이 부산과는 다른 냉기를 품고 있다는 걸 알았다.


굳이 머릿속엔 남음 생활비가 빠듯한 걸 알면서도 잠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해서 막차를 놓쳤다.

거리감을 부산쯤 생각하고 겁 없이 택시를 탔다.

택시는 신도림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한강의 불빛이 흔들렸다.
붉고 노란 점들이 물결 위를 스쳤다.
도시의 심장이 뛰는 듯했다.


‘부산의 강물은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왜 서울의 강물은 이렇게 아름답지?’


한강 주변의 아파트들은
철제 빗장처럼 줄지어 있었다.
그 불빛 사이로
내 자리는 없었다.


‘나는 이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생각이 스치자

미터기 속 붉은 숫자가
심장처럼 뛰기 시작했다.


택시비는 어느새 오만 원을 넘어 있었다.


‘이 돈이면 부산도 가겠네.’


혼잣말을 내뱉으며 웃었다.

그 순간,
엄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서울은 무서운 사람 많으니까
밤늦게 다니지 마라.”


시골에 혼자 남아 있을 그 목소리가
귓가에서 아른거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돌아갈 길이 사라진 사람이었다.


언제든지 원하면 일할 수 있는 곳,
대신 뿌리를 내리기는 어려운 곳,

그게 서울의 잔인한 매력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서서히 나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서른이 되어가는 나이,
부산의 친구들은 대학원에 다니다,
결혼을 준비하며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 대신,
어른이 되는 대신,
그저 버티는 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택시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그 속의 나는
이 도시의 밤에 기대어
나로서의 첫겨울을 통과하고 있었다.


한강의 불빛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이 나를 울게 했다.


그날 나는 알았다.
나는 이제,
예전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 낯선 도시의 한가운데서,
비로소 중력에 발목을 잡히며
‘나로 살아남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꽃씨는 바람을 따라 떠돌다
결국 중력에 이끌려
땅에 닿는다.

그건 추락이 아니라,
뿌리를 내리기 위한 첫걸음이었다는 것은 한참 뒤에나 알게 된다.

나의 한강은,
그렇게 나를 바닥으로 이끌었다.


월요일 연재
이전 01화1부. 여자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