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빛 아래, 내가 자라는 법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 찾기

by Karin an

부산에서 지낼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자로서의 삶에 선택지가 거의 없는 세계를 보고 자랐다.
10여 년 전쯤의 부산은
지금보다 훨씬 폐쇄적이었고,
주변에서는 늘 말했다.


“결혼은 한 번에 잘해야 한다.”
“적당한 나이에 안정된 남자를 만나야 한다.”
“집안이 튼튼해야 여자 인생이 편해진다.”


그 말을 들을수록
내 안엔 이유 모를 반발심이 더 크게 일었다.
여자의 길이 하나뿐이라는 듯 말하는 세상이
나를 더 숨 막히게 했다.


게다가 “여기 아니면 다른 데선 춤도 못 춰.”
그 말은 마치 보이지 않는 울타리처럼
나의 선택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부산을 떠나 서울에 왔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기후에 떨어진 작은 씨앗 같았다.


어떻게 뿌리내릴지도 모르겠고,
혼자 사는 여자의 삶은
휘청거리기 쉬운 위험한 선택처럼 느껴졌다.
돈은 없는데 시간은 많아지고,
그 시간은 생각을 끝없이 어둡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여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빛처럼 반짝이던 여자 — 여성성의 힘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눈빛이 더 맑아지고 말끝마다 빛이 솟는 친구가 있었다.
무용심리를 공부하던 그녀는
감정과 몸의 언어를 깊게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여성성은 꾸밈이 아니라, 본래 가진 매력과 장점이에요.”
그 말은 나를 오래 붙들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늘
우리가 여러 관계 속에서 어떻게 더 경쾌해질 수 있는지,
삶이라는 무대를 어떻게 주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지로 향했다.


나는 그녀를 보며 처음으로 알았다.

내가 자라난 곳에서 본 ‘여성의 삶’은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여성적 에너지는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깊이 믿을 때 나오는 힘이라는 것을.


다정하지만 단단한 여자 — 믿는 것에 책임지는 사람


또 다른 친구는
외국인들의 정착을 돕고,
비건 문화를 확산시키고,
틈틈이 시를 쓰며
자신의 목소리를 꾸준히 세상에 바치는 사람이었다.


말은 부드럽지만
신념 앞에서는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게 자주 말했다.


“따뜻함도 힘이 될 수 있어.”


그리고 한 번 ‘욱’하면 돌진하던 내 성향을
서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다독여 주었다.
그녀를 통해 나는 배웠다.
강함이란 날카로움이 아니라,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힘일 때 더 오래 간다는 걸.


끝내 함께할 수 없었던 여자들 — 기다리는 삶


물론 서로 맞지 않았던 친구들도 있다.

늘 “답답하다”고 말하면서도
삶의 무게를
‘괜찮은 남자’에게 맡기려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것도 분명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는 욕망의 방식이니까.

하지만 그 길은 내 길이 아니었다.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산에서 품었던 반발심—
“나는 나 스스로 서야 한다”—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어디까지 함께 걸을 수 있을지
오래 가지 않아 서로 알게 되었다.


타인은 언제나 거울 속의 나


서울에서 생활하며 새롭게 만난 나의 여자 친구들은 그저 친구가 아니라
모두 나의 거울이 되어주었다.


내가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를 선택하는 사람들.

그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꼭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되었다.


누군가는 사랑받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누군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단단해지는 법을 알았다.
때로는 한 번 무너진 꿈을 다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립하고 있었다.

그 모든 흐름이 내게
하나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내가 선택한 길 — 기대지 않고 서는 삶


만남과 헤어짐,
삶의 속도를 서로 다르게 가진 사람들과의 스침 속에서
나는 아주 천천히
내가 원하는 삶의 결을 알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의 보호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고,
누군가의 조건으로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내 이름으로 세상에 서는 사람’
이고 싶었다.


가난했던 시절을 견디게 했던 것도
결국은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세상이 말하는 “여자로서의 정답”은
나에게 정답이 아니라는 걸.

내 안에서 조용히 자라나는 나만의 방식—
그 길이 내 삶에 가장 잘 맞는다는 걸
서울의 몇 해 동안
천천히,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이야기몸’이라는 단체를
내 이름으로 시작했다.


그건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빚어낸 첫 번째 세계였다.





나는
이게 꽃씨인지, 나무의 씨앗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였다.
어떤 씨앗은 햇빛을 좋아하고,
어떤 씨앗은 그늘에서 더 잘 자라며,
어떤 씨앗은 폭풍을 견딜 줄 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메마르고 삭막해 보이던 서울의 땅에서
나는 사람이라는 이름의 영양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서로 다른 세계를 가진 여자들,
서로 다른 삶의 속도를 가진 친구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단단해지려 애쓰던 그들.
그들을 통해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가 어떤 방향으로 자라고 싶은 씨앗인지
알아가기 시작했다.
어떤 씨앗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
내가 이제, 나만의 뿌리를 내릴 준비를
천천히 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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