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바위 보 #3

뱅골 호랑이

by 칼이쓰

일주일째, 은이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지만 적어도 목요일 밤이면 그날 무슨 책을 읽었는지, 그래서 기분이 어떤지 전해 오는 친구인데 수요일에 소개팅을 한 이후 다시 수요일이 되도록 소식이 없다. 심지어 오늘은 선주의 생일이었다. 생일 축하는 바라지도 않으니 살아있는지 확인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은이의 집 앞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려다 바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그곳은 선주의 집이었다. 은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선주가 자신의 원룸을 내어준 것이었다. 집을 나와 얼마간 회사생활을 하며 활기차게 살던 은이는 돌연 사표를 냈다. 나이 든 회장이 회사자금을 교묘하게 빼돌려 개인 용도로 썼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숱한 일을 처리하는 짓을 더는 못해먹겠다는 이유였다. 이후로 일 년째 잠만 자고 책만 읽었다. 대상이 무엇이든 이별을 할 때면 늘 그랬다. 지겹도록 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어느새 멀쩡해지는 은이를 알기에 선주는 걱정하지 않았다.


둘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다. 선주는 밝고 활기차서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게 없었다. 반면 은이는 평범했다. 지극히 조용해서 어디서나 있는 듯 없는 듯 한 학생이었다. 같은 반이 아니었던 두 사람이 서로를 발견한 것은 동네 도서관에서였다. 은이가 빌리려던 책을 선주가 먼저 빌리고 선주가 빌리려던 책을 은이가 먼저 빌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둘은 인사를 나누었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웃는 모습이 닮은 서로를 발견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마룻바닥에 놓인 핸드폰이 보였다. 앞뒤가 분리되어 배터리까지 나와있는 걸 보자 하니 폰을 떨어뜨렸거나 던졌거나 둘 중 하나였다. 물기 없는 싱크대와 등 돌아 꺼진 텔레비전 너머로 침대에 엎어져있는 은이가 보였다. 머리맡엔 언제 입고 벗었는지 모를 셔츠와 바지가 몇 개씩 널브러져 있었다. 은이의 등이 규칙적으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확인한 선주는 침대 주변에서부터 옷가지와 물건을 치우기 시작했다. 은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대다가 바닥을 차는 듯한 자세로 발을 세 번 굴렸다.

'살아서 잠꼬대하는 게 생일 선물이구나.'


"어라, 너 호랑이..."

잠에서 깬 은이가 눈만 뜬 채 말했다.

"꿈꿨어?"

선주는 태연하게 물었다.

"응. 어마어마하게 무섭고 큰 호랑이가 되었어, 너. 그래서 나보고 등에 타라고 텔레파시를 보냈는데 난 물이 무서워서 못 타겠다고 했지."

"물?"

"강을 건너야 했거든. 그랬더니 네가 등에 올라 타면 물에 하나도 안 젖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어. 눈을 질끈 감고 제자리에서 발을 세 번만 구르면 네 등에 탄 줄도 모른 채 다 지나가 있을 거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니까 뱅골 호랑이라서 가능하다는 거 있지."

"지난주에 <파이 이야기> 읽었구나? 어쩐지. 아까 너 발 굴리는 거 봤어." 선주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다 지나갔어? 어디로 갔는데?"

"응, 순식간에. 눈을 계속 감고 있는데 네가 다 왔다고, 떠보라 해서 떴더니 지금이야."

"결국 나때매 깼다는 거네."

"생일 축하해."

"되게 자존심 상하는데 감동적인 거 알아?"

"응."


은이는 소개팅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폰을 꺼둔 이유도 말하지 않았다. 선주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함께 미역국을 끓여 먹고 집 주변을 잠깐 산책했을 뿐이었다. 오랜 세월을 변함없이 지내온 그들 우정의 방식이었다.

은이는 선주가 돌아간 뒤 어둑한 방에 홀로 앉았다. 선주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독립을 했지만 생각만큼 자유롭지 않았다. 아버지의 지나친 간섭과 어머니의 끝없는 걱정은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아도 언제나 느껴졌다.

"이민을 가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같아. 아님 미친 듯이 바쁘고 정신없는 회사에 취직을 해야 할까 싶어. 마음 같아선 좀 더 쉬고 싶지만 슬슬 모아둔 돈도 떨어져 가는 마당에 마냥 이러고 있을 순 없겠지?"

"부모님이 만족할 만한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면 어떨까? 물론 네가 좋아하는 게 우선이고 말이야. 내가 한번 찾아볼게. 일단 사람을 만나고 일자리도 찾자. 차근차근하면 돼."

그렇게 선주가 찾은 사람과 만났다. 수요일의 첫 만남 후 토요일과 월요일, 단 두 번의 데이트.

은이는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타고난 성향과 자라면서 바뀐 취향 등을 이야기하며 그가 그녀를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가 남자로서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또다시 '그 일'이 반복될 거란 두려움이었다. 수훈 정도면 부모님이 좋아하시지겠지. 게다가 좋지는 않아도 싫지도 않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보여주지 않았고, 현실적인 대답만 했다.


"이 가게 참 깔끔하고 예쁘죠? 사장언니가 직접 꾸미고 이 테이블도 직접 만든 거래요."

"고생을 사서 하네요."

"저 골목길 걷고 싶어요. 차 좀 세워 줄래요?"

"어디에나 있는 길인 걸요."

"세상에. 저런 사고로 죽어버리면 얼마나 슬플까. 남아있는 가족들은 또 어떻고..."

"죽을 때 돼서 죽은 거예요. 죽음은 다 슬픈 거고."


그와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의 입술은 차갑고 단단한 게 틀림없었다. 고작 세 번을 만나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아직 잘 몰라서 그런 게 아닐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하지만 그의 대답들은 말 한마디로 기운을 빠지게 하는 아버지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아무 얘기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런 대화를 나눌 사람은 한 명으로 충분하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의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만남. 은이는 그렇게 결론짓고 자정 무렵 수화기를 들었다.

"선주야 미안해. 그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다행히 내일은 목요일이었다. 오전 열 시에 골라둔 책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은이는 이내 잠을 청했다. 뱅골 호랑이를 만나 또 다른 강을 건너 멀리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