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바위 보 #2

Dear. 은이

by 칼이쓰

18시 55분.

은이는 5분 전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만나기로 한 곳은 그녀의 집과 가까운 조용한 카페였다. 창밖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창문을 열어놓아서 멀리 파도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파도소리를 좋아하는 카페 주인은 카페의 이름을 '바다의 노래'라 짓고 늘 오래된 팝송을 잔잔하게 틀어 파도소리와 섞이게 했다. 은이는 목소리가 작아서 처음 보는 사람과 애써 소리를 높여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과 밥을 먹고 싶지도 않았다.


염색하지 않은 머리카락엔 타고난 곱슬끼가 있어 보인다. 이른 아침에 잘 다렸을 흰 셔츠는 하루 종일 업무를 보느라 접어 올린 팔 부분의 주름을 머금고 있다. 진한 색의 청바지와 남색 운동화를 신은 남자. 선주가 문자로 보내준 사진 속 얼굴이다. 남자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바다를 바라보다가 다시 물을 마셨다. 옆 자리엔 갈색 서류가방이 놓여 있다. '가방 속엔 어떤 책이 있을까' 은이는 궁금해하며 인사를 건넸다. 얼마간 형식적이고 진부한 대화가 오고 갔다.


"대구 갈래요?"

은이가 불쑥 물었다.

"네? 대구요?"

수훈이 뜨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엉뚱하시네요. 농담이죠?"

"네. 농담이었어요."

은이는 농담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가자는 것도 아니었다. 어색한 남녀의 단조로운 대화. 'ㅅ'의 흔한 레퍼토리가 지겨웠다. "대구 갈래요?"라는 물음에 "언제 갈까요?"라고 되묻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일까.

그는 분명 안정적인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신사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다. 실없는 농담 하나 허투루 하지 않고 할 말만 하는 성격이었다. 같이 있으면 재미있을 일은 하나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불안할 일 역시 없겠네.' 은이는 생각했다.


"요즘 어떤 책 읽으세요?"

은이가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아... 요즘은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었어요."

수훈은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책을 정말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은이는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와 책의 제목을 묻고 싶었지만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스무 살의 봄날, 은이는 봄바람을 타고 나타난 운명 같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특유의 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곁에 있을 때면 깊은 숲 속에 오로지 그와 그녀만 있는 듯했다. 하늘을 둘러싼 나뭇잎 사이사이로 햇살이 숨바꼭질했다. 숲과 조금 떨어진 저쪽엔 바다가 펼쳐져 비릿한 바다의 냄새가 났고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숲과 바다. 그는 은이에게 크고 푸른 존재였다. 그의 푸른 향기에 날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가 그녀를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눈길로 바라볼 때, 숨이 막히도록 꼭 안아줄 때,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게 감싸줄 때마다 은이는, 사랑을 형상화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가방엔 언제나 책이 있었다. 편식하지 않고 여러 분야의 책을 읽던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한 달 동안 읽은 책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한 권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책의 맨 첫장에 날짜와 'Dear. 은이'를 쓰고 숫자를 매겨주었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이 지나고 열한 번째 책 선물을 받은 겨울의 어느 날 은이는 집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책을 보고 추궁을 시작한 은이의 아버지는 그녀를 죽일 듯이 때렸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연애를 시작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는 하루아침에 바뀐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왜 그토록 화를 내는지, 어머니는 왜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우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몸을 스치기만 해도 몸이 떨려왔다.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밤마다 꿈속에서 잘못했다고 빌었다. 크고 푸른 그녀의 사랑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쉽사리 가시지 않는 공포는 책을 읽을 때만 수그러들었다. 정신없이 읽고 또 읽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나날이었다.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에게 또 한번 바다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크고 넓진 않았지만 구릿빛 피부와 어린 미소를 지닌 싱그러운 청년이었다. 그와 함께할 때면 바닷속에서 신나게 보물을 찾는 기분이었다. 그 역시 책을 좋아했다. 이번엔 그녀가 남자에게 책을 선물했다. 한 달에 한 권씩. 가장 재미있었던 책을. 그리고 그녀는 정해진 수순처럼 다시 갇혔다. 취직을 준비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연애를 한다는 이유였다. 어머니는 쓰러지셨다. 그녀는 수면제를 사들였다.


-


은이는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선주는 은이를 어떻게든 평범한 이십 대 여자로 돌려놓으려 했고, 그런 선주의 마음을 은이가 모를 리 없었다. 토요일에 이 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수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책만 읽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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