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시옷
전날 밤 열한 시에 잠든 은이는 여덟 시에 일어나 눈을 뜬 채 만 채 화장실에 갔다. 어기적거리며 방으로 돌아와 다시 누웠다. 일어나 밥을 먹을까, 좀 더 누워 있을까 하는 고민을 시작한 지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잠이 들었다. 밤이나 낮이나 그녀는 계속 잤다. 가끔씩 일어나 밥을 먹고 소화를 시키기 위한 호흡하기와 서있기를 실행한 후 역시 잤다. 매일을 그렇게 지내다가 목요일이면 일곱 시에 일어나 집을 나섰다. 가장 일찍 문을 여는 카페에 가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하루 종일 읽으려고 가져간 책 두세 권을 다 읽기 위해서였다. 하루 만에 읽은 책의 내용들은 어떨 땐 서로 뒤섞여 은이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남았다. 읽은 건 많은데 그 책의 메시지가 무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70퍼센트는 확실하지 않아 대답을 회피하는 그녀였다. 새로운 이야기로 은이는 그 다음주 목요일까지 일주일을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일을 절대 빼먹지 않았다.
수요일 오전 열 시. 머릿속 이야기는 모래사장에 새겨놓은 글귀가 바닷물에 휩쓸려가듯 어디론가 쓸려가고 내일 읽을 책을 골라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만큼은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 책장을 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책을 꺼냈다. 읽기 싫은 책을 골라도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한다는 나름의 원칙을 따라 지겹기 짝이 없는 책을 집었을까 봐 두려운 마음으로 고른 책의 제목을 보았다. <위대한 개츠비>와 <파이 이야기>였다. 다행히 그녀가 좋아하는 책만 골랐다. 한 권을 더 꺼낼까 말까 고민하며 책장 옆에 놓인 달력을 보았다. 깨끗한 달력에 단 한 날짜에만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고, 조그만 글씨로 '19:00,ㅅ' 하고 적힌 것이 보였다. '공교롭게도 오늘이군.'
지난주 금요일 친구 선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막 튀겨낸 크로켓을 한입 베어 물려고 입을 아 벌리는 찰나였다. 머리맡에 벗어둔 셔츠를 두손으로 보드랍게 감싸 쥐고 실제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바삭거리는 식감을 놓친 은이는 매혹적인 기름 냄새마저 꿈이었다는 사실에 억울했다. '도저히 전화받을 기분이 아니야.' 전화벨이 어느 정도 울리다 끊기길 기다렸다. 그러나 전화벨은 끊기지 않고 끝없는 소용돌이가 되어 그녀의 귓구멍을 타고 들어왔다. 이래도 안받을 거냐는 듯 귓속을 휘젓고 다니는 통에 마지못해 통화버튼을 눌렀다. 선주는 일단 들어보라며 외치기 시작했다.
"공무원 3년 차, 원룸이지만 자기 집이랑 차도 있고 키도 크고 착하대! 취미는 독서고 나이는 서른셋,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야. 어때?"
"뭐가 어때?"
"그냥 말이 좋은 그런 취미가 아니라 진짜 책을 좋아한다잖아. 게다가 착하다니까 말 다했지! 오늘 저녁에 약속 잡아놨어. 딴소리 말고 나와."
하지만 은이에게 금요일은 누굴 만나선 안 되는 날이었다. 책을 읽고 삼일이 흐르는 동안은 그 어느 때보다 감상에 젖어 지내야 했다. 은이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선주는 다시 말했다.
"그래, 알았어. 너 오늘부터 주말까지 안된다고 말하려 했지? 그럼 언제가 좋겠어?"
"수요일."
그 공교로운 수요일이 되어버렸다. 소개, 선 같은 말을 쓰기 싫어 'ㅅ'이라고 써놓고 누가 봐도 뭘 뜻하는지 알아볼 수 없을 거라며 흐뭇해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공교로웠다. 은이가 'ㅅ'을 당장 거절하지 않고 "한번 만나나 볼게."라고 선주에게 대답한 이유는 그 남자의 취미가 독서라고 해서였다. 그것도 그냥 말이 좋은 그런 취미가 아닌 진짜 취미. 선주와 통화한 이후에 은이의 마음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어젯밤만 해도 울적해진 기분에 역시 아직까지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은이였다. 여덟 시에도 확실하지 않았던 그녀의 마음은 열 시가 되어서야 확실해졌다. 좋아하는 책을 골랐으니까. 오늘이 어쩌면 별로가 되더라도 내일은 좋아하는 이야기로 하루를 채울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었다. 그녀는 '시옷'을 중얼거리며 느릿느릿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