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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이쓰 Feb 13. 2016

책의 숲

봄날의 곰만큼 좋아.


이틀 동안 쉼 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봄기운을 가득 머금고서. 내가 태어난 계절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누가 줄 지 알 수 없지만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것들을 생각했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이 떠올랐고 다른 건 없었다. 처음 출간되었을 때만 해도 뻔한 장삿속이라며 외면했다. 초판본이 아닌 시집을 이미 가지고 있기도 하니 그걸 살 바에 다른 책을 사겠다며 혀를 차 보지만 별 수 없다. 생각할수록 갖고 싶은 걸 어째.


언젠가 시리즈로 되어 있는 책을 한 권 한 권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 받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각 책의 첫 장엔 그들의 이름을 쓰고 다 읽은 후 마지막 장엔 짧은 메시지를 써서 그들에게 다시 한 권 한 권 돌려주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셜록홈즈> 시리즈와 <삼국지>를 새삼 소장하고 싶어 중고서점에서 하나씩 사 모으고 있는 중인데, 내가 <셜록홈즈> 혹은 <삼국지>를 몇 권까지 모았는지 모르는 누군가가 느닷없이 한 권을 선물한다. 그것이 나의 책장에 꼭 들어맞는다면? 굳이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을 말하자면 이것뿐이다. 정말 더는 없다.


책은 책장에서 가만히 날 쳐다만 본다. 절대 먼저 다가오지 않고 첫 장을 펼쳐도 쉽게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는다. 중간에 지쳐 책을 덮어버리면 그 책의 진가를 알 수 없다. 끝까지 읽으면 책은 자신이 품고 있던 모든 이야기와 함께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책을 덮고 뒤돌아서도 뜨거운 여운으로 한참을 곁에 머문다. 꼭 고양이 같다. 이런 요물을 봤나.


요물 같은 책은 어딜 가나 내 시선을 붙잡고 발길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공부하러 도서관에 가면 하루 종일 책만 읽고, 공부하려고 들고 간 책과 대여한 책이 가득 든 가방을 한 짐 메고 오느라 낑낑댄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려고 서점을 약속 장소로 잡고는, 언제나 약속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면서 꼭 그날만 이삼십 분 일찍 도착해 생각지도 못한 책을 구입하고 만다. 그렇게 내 방은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 길과 한 사람 쭈뼛거리고 앉을 공간만 남은 헌책방의 모습처럼 책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되었다.

 


세상에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책이 있다.


-오수완,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에서-



그래, 세상에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책이 있다. 내 좁은 방에 가득 들어앉아 있는 책들을 좀 빼낸다고 해도 밤하늘의 별만큼 책이 많은 이 세상엔 아무 지장이 없을 테지. 이 책들은 돌고 돌아 어딘가에 자리 잡을 것이고 어찌 됐든 세상의 별로 남아 있을 거니까. 책장과 방바닥 구석구석에 책이 너무 많아서 발 디딜 틈도 없고 잠도 모로 누워 자야 할 판인 내가 책을 좀 팔거나 선물한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읽은 지 오래된 책, 지루했던 책, 표지가 안 예뻐서 다른 책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성가셨던 책부터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권, 두 권, 세 권. 뺄 때마다 이별의 슬픔이 몰려왔다. 이 책은 친구가 생일 선물로 줬고 저 책은 부모님의 구박ㅡ넌 허구한 날 소설만 읽냐!ㅡ을 받으며 기어이 샀고 또 이 책은 열 번도 넘게 읽었지만 한 번 더 읽고 싶고...


지금 사는 곳에 처음 이사 왔을 때 난 네 살이었다.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무렵 집 가까운 곳에 서점과 책 대여점이 생겼다. 그곳은 어린 나에게 신세계였다. 고등학교 때 책 대여점이 없어지면서 한 권에 이삼백 원씩 주고 산 책들, 책을 살 때마다 책의 마지막 장에 그날의 날짜를 도장 찍어주던 동네서점의 책들. 오래 버티던 서점은 여섯 달  전쯤 리뉴얼된 모습으로 돌아오겠다는 현수막을 걸어두고 얼마 전 천냥 마트가 되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었다. 꺼낸 순서 반대로 얌전히 제자리에 넣어두고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당연했는데 그 당연함들이 소중함이 되니 단 한 권도 떠나보낼 수 없게 된 것이다. 책을 보내는 것은 그 책에 깃든 나의 시간과 생각까지 멀리 보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책에 얽힌 옛 기억들이 떠올라 기분이 묘해졌다. 아무리 겪어도 익숙하지 않은 이별을  애써 할 필요는 없다. 사람 간의 이별, 상황에서의 고립은 어쩔 도리가 없으나 내 작은 방에 있는 책만큼은 되도록 오래 함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을 샀다. 그리고 봄기운을 가득 머금은 비가 아직 내리니까, 내가 태어난 계절의 냄새가 하루 종일 마음을 들뜨게 하니까, 내가 태어난 해에 출간된 <노르웨이의 숲>을 샀다.


스무 살에 처음 읽은 후로 몇 번을 읽었는지 알 수 없는 <상실의 시대>. 읽고 읽고 읽었다. 중간중간엔 그의 다른 책들을 읽어가면서. <노르웨이의 숲> 역시 <상실의 시대>와 제목과 출판사가 다르고 번역이 조금 다를 뿐이니 외면했던 책이었다. 상관없었다. 작가가 지은 원래의 제목을 달고 조금 더 매끄럽고 감각적인 번역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을 수 있으니 그걸로 됐다. 나도 순수한 나 자신이 되어 조금 더 둥글고 단단한 모습이 될 것만 같다.



"네가 정말로 좋아, 미도리."

"얼마나 좋아?"

"봄날의 곰만큼 좋아."

"봄날의 곰?" 미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뭔데, 봄날의 곰이?"

"네가 봄날 들판을 혼자서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벨벳 같은 털을 가진 눈이 부리부리한 귀여운 새끼 곰이 다가와. 그리고 네게 이렇게 말해.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너랑 새끼 곰은 서로를 끌어안고 토끼풀이 무성한 언덕 비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 종일 놀아. 그런 거, 멋지잖아?"

"정말로 멋져."

"그 정도로 네가 좋아."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에서-


봄날의 곰 같은 책들이 내 방에 쌓여 있다. 그들은 방의 빈틈을 찾아 발을 내딛는 나에게 말한다.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나는 책을 끌어안고 책의 숲을 누비며 하루 종일 논다. 봄날의 곰만큼, 그러니까 존재만으로도 좋은 나의 작은 책의 숲만큼 당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날이 나에게도 올까.


우선 봄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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