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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이쓰 Feb 18. 2016

나의 친구, 나의 소녀, 엄마

엄마를 만나고 나를 발견하다

앞머리는 참 이상하다. 기르면 자르고 싶고 자르면 기르고 싶다. 앞머리는 뒷머리와 달리 한번 머리카락을 자르면 귀뒤로 넘어갈 만큼 기르는 일이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어서 좀처럼 쉽지 않다. 길러보려고 해도 이른바 '거지 존'을 이겨내지 못해 자르고 자르는데 그렇게 앞머리를 눈썹 근처까지 길이로 유지한 게 십 년을 넘었다. 얼굴이 조그맣고 이마가 예쁘면 어떤 곤란함에도 굴하지 않고 중간에 한 번쯤 앞머리 기르기를 시도했겠지만 그건 또 아니어서 같은 스타일을 고수해 온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날 툭하면 눈을 찔러대는 것이 귀찮아져 어떻게든 앞머리를 길러보자고 결심을 했다. 눈 밑까지 머리가 내려올  때쯤이었다. 원활한 거지 존 극복을 위해 앞머리에만 웨이브를 줄 심산으로 미용실에 갔다. 그런데 글쎄, 자연스럽게 파마를 해달라고 했더니 한마디 예고도 없이 앞머리를 싹둑 자르고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기가 막혔다. 실컷 기르는 중인데 뭐하는 짓이냐고 따지고 사과를 받았지만 진심이 젼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기왕 자르고 파마했으니 이모양 이대로 길러보자,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엄마께도 말씀드렸다. 그러자 나와 얼굴형도 똑같고 이마 모양도 똑같은 엄마는 당신의 십 대 시절 모습을 떠올리셨다. 앞머리를 기르면 그때 당신의 모습과 똑같아질 것 같다며 응원(?)해주셨다. 약 40년 전 엄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봤다. 부모님의 결혼식과 그 이후의 일들은 사진으로 많이 봐왔는데 그 전의 사진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왔지만 내가 먼저  궁금해한 적은 없었다는 것. 옷장 속 가장 깊은 곳에 보물처럼 간직한 흑백사진들을 단 한 번도 보여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는 것.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딸들을 만날지 꿈에도 몰랐던 한 소녀의 얼굴엔 언니의 눈과 나의 이마가 있었다.


'무엇'이 되어야 하는 줄만 알았다. 그 '무엇'이 도대체 뭔지 모르면서. '무엇'이 되기 전에 '나 자신'이 되어 오늘을 살기로 마음먹은지 열 달 하고 넉 달이 지났다. 나의 모든 치부를 알고도 늘 곁에 있어주었던 친구이자 하나뿐인 언니가 결혼을 했고, 어떤 결심이나 계획 없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맞이한 첫해였다. 서른이 되면 삶이 더 큰 나락으로 빠지리라 두려움에 휩싸인 스물아홉 새해의 결심이었다.


글을 썼다.
필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엄마를 만났다.


엄마와 헤어져 있었느냐고 혹은 엄마와 멀리 떨어져 사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전혀  아니오'이다.


내가 여행을 가지 않는 이상 엄마와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매일 눈을 뜨면 안녕히 주무셨냐고 인사하고 하루에 한 끼 혹은 두 끼를 함께 먹었다. 하지만 그동안 난 엄마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서글픔과 죄송스러움이 있었을 뿐 한 사람으로서, 여자로서, 그녀와 그녀의 인생을 미처 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엄마와 데이트를 시작했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미루며.

시간이 얼마 없게 느껴져서, 괜스레 서른이 되면 무언가 많이 달라질 것 같아서였다.


이런 장면이 너무 좋은데 딸내미 역시 좋아하니 더 좋다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부산 영도 흰여울길, Nikon FM2)


나는 저절로 이렇게 생겨먹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늘과 바다를 좋아하고 시와 낭만을 좋아하고 남들이 지나치는 것을 발견해 사진으로 담고 별스럽지 않은 일에도 잘 웃는 엄마를 보았다. 그것은 곧 나이기도 해서 나의 성향이 얼마나 엄마의 그것과 닮았는지 알게 되었다.


부산 이기대, Nikon FM2
부산 자갈치, Nikon FM2
부산 해운대 동백섬, Canon Eos m
부산 감천문화마을, Canon Eos m


차를 타고 달리기보단 뚜벅뚜벅 걸으며 천천히 구석구석 들여다보기.

구름이 예뻐서 나란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다가 하나는 전봇대와 뽀뽀하고 하나는 깔깔대며 웃기.

붉고 노랗게 지는 노을을 보며 맥주 한 캔 나눠 마시기.

엄마는 여리고 천진한 소녀였다. 나와 아주 닮고 마음이 잘 맞는 친구였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는 이미 소녀였고 나를 만나자마자 그녀는 나의 친구였는데, 그 사실을 나만 모른 채 29년간 외로웠다. 바깥에서 찾느라 가장 가까이 있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외할아버지 이야기와 어린 시절 엄마의 단짝 친구 이야기... 태종대를 걷고 동백섬을 걸으며 몰랐던 엄마를 만났다. 그리고 엄마는 누구보다 나의 마음과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1972년 추석 무렵, 꽃보다 아름다운 이팔청춘 열여섯 소녀들 속 나의 엄마. (Canon Eos m)


엄마는 평생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고운 손 마디마디가 문드러지고 지문이 닳도록, <생활의 달인>이라는 SBS 프로그램에 달인으로 출연할 만큼. 당신은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며 행여나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 쉬쉬하지만, 언니와 난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젊은 시절 세상의 온갖 안 좋은 것은 다 하며 방황했던 아버지가 제자리를 찾기까지 우리 집의 가장으로 부모의 역할을 힘겹게 해낸 엄마의 희생을 눈으로 확인하고 펑펑 울었다.


집과 회사만 다니며 가까운 곳조차 마음 편히 다녀보지 못한 엄마를 모시고 다닌 1년은 순간마다 추억이 되었다. 당신은 딸 덕분에 재밌는 경험 많이 한다고, 데리고 다녀 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지만 난 엄마가 나의 엄마여서, 내가 더 감사하다고 했다. 한 여자로서 한 사람으로서의 엄마를 만나며 사랑의 마음이 커진 만큼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한동안 나는 내가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참 어리석었다. 이렇게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친구를 두고.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너무 늦은 게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다른 지방 다른 나라까지, 가도 가도 갈 곳은 넘쳐나니 오래 살아야 한다고, 그러니 해외여행도 가자고 하면 엄마는 또 소녀처럼 웃는다.


작년 엄마의 생일 때였다. 생전 처음 엄마의 생신상을 내 손으로 차리면서  문득 엄마와 나의 나이를 떠올려보았더니 스물아홉 그녀의 뱃속에서 내가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막상 지나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예나 지금이나 스물아홉에겐 혼란스러웠을 서른이라는 나이를 엄마는 만삭의 몸으로 맞이했다. 그래서 당신은 언제나 나보다 서른을 더 살아온 인생선배였다. 드디어 엄마의 나이가 내 나이의 딱 두배가 되는 해가 온 것이다.


2016년이 시작될 때 엄마는 '예순'이라는 단어를 쓰기 싫어했다. 예순이 뭐 어때서요, 그럼 서른 더하기 서른은 어때요? 작은딸 나이 두배 해도 되고. 하자 그거 좋은 생각이라며 환하게 웃으셨다. 더 많이 웃으셨으면 좋겠다. 고단하게 지내온 인생이지만 지금이라도 많이 웃어서 이왕 생길 주름 예쁘게 졌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도전해 볼까. 앞머리를 길러 소녀 시절 엄마와 똑 닮은 모습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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