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칼이쓰 Jul 31. 2019

핑계

핑계는 그만 다 치우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나름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다. 하나하나 열거할 만큼 자랑스러울 건 없지만, 다른 이에게 손 벌리거나 피해를 주지 않고 적어도 내 앞가림은 하면서 살고 있다. 이렇게만 되길 바란 적도 있었으니 오늘을 바라던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이직 준비를 하고 있다. 홧김에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매일 해왔지만 진심으로 다른 일을 하고 싶어 작정하고 찾기 시작한 건 올해 초부터였다. 일반적인 회사 일은 아무래도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어쩌다 부담스러운 직책을 떠맡아 중간 입장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기 일쑤에, 공과 사가 구분되지 않게 시도 때도 없이 거래처 전화를 받는 것 역시, 그러려니 하다가도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몇 달에 한번 가는 부모님 댁에서 급히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해야 하는 지금의 일은 한량이 꿈인 나에게 너무 무리한 처사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행기를 타느라 핸드폰을 끌 때 아니고서는 이 업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이라면 상관없다. 힘들지언정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직업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일이고 나의 일이 아니다. 또한 내가 하고 싶은 다른 것들을 하기 위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서, 말하자면 애정이 없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예전에 1년 남짓 일했던 경험을 살려 카페 쪽 업무를 알아보았다. 안 해봤으면 여기저기 혹해서 가보자! 하겠는데 그것도 어중간하게 알고 있으니 선뜻 내키지 않는다. 이제는 다리가 예전처럼 튼튼하지 않아 하루 종일 서서 일할 자신도 없다. 거기다 일요일에 마신 진한 커피 한잔에 지금까지 위가 아프고 쓰려 밥을 제대로 못 먹고 있다. 당장 그 일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 모를까 아무래도 어렵겠다.

애매한 나이와 애매한 경력, 거기에 제주도라는 지역적 한계. 앉아서 하는 일도 싫고 조직적인 일도 싫고 서서 하는 일도 힘들고 사람 대하는 일도 힘드니 뭐 어쩌자는 건가 싶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온몸의 신경은 예민해서 마음이 거부하는 일을 했다간 바로 병이 나질 않나. 아무리 애를 써도 밥을 빨리 먹지 못하고 매사에 동작이 느린 사람이 몸까지 나른해서 결국은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다 치우고 니가 하고 싶은 게 뭔데?
정리되지 못한 채 두서없이 튀어나온 말에 나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했다.
넌 그냥 글 쓰고 사진 찍고 그림 그리고 혼자 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그러면 무조건 그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그 일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제발 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그제야 아차 싶었다.
바로 얼마 전 친한 친구도 말했었다.
고민을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나에게 생각이 너무 많다며, 그냥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엄청난 실력이 아니고 자금도 없으니 전업작가가 될 수 없다며 수단으로 직업을 가진다. 그러나 일만 한다. 일복은 많아서 어딜 가나 혼자 바쁘다. 저질체력을 일에 다 쏟으니 좋아하는 일에 쏟을 에너지가 없다. 10년 후, 아니 당장 1년 뒤도 예상할 수 있다. 난 그렇게 내 일도 아닌 일을 위해 온 힘을 쏟아부으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갈 것이다. 그땐 또 다른 핑곗거리가 더해져 더욱이 일을 그만둘 수 없이 '글 쓰고 싶은데.. 그림 연습하고 싶은데..' 말만 하고 있을 것이다. 그저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묶여 평생 지금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말이다.


어쩌면 구하지 않아서 구하지 못했고 찾지 않아서 찾지 못했으며

두드리지 않아서 열리지 않았던 게 아닐까.

석 달쯤 되었나. 책을 만들려고 남몰래 작업한 지가. 거창하고 완벽한 것을 추구하다간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역시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했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시작을 하고 싶었다는 말이 맞다.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혼자 보는 공간에 글을 쌓아두는 일도 좋지만 더 늦기 전에 한 번만.
이렇게 말을 내뱉는 일이.. 언니가 결혼했을 때, 오랫동안 하던 공부를 멈췄을 때.. 최근 오 년간 대여섯 번쯤 되었던 것 같다.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땐 자주 작심을 하는 수밖에.

이직은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 제쳐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곳만 찾기로 했더니 조건 검색 공고가 매일 0이다. 그래도 괜찮다. 빚 없고 딸린 식구(?) 없을 때 조금이라도 시도해봐야지. 5년 뒤의 나에게 편지를 써두어야겠다. 그동안 내 인생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 핑계만 대며 우물쭈물해왔던 것을 사과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깊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