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칼이쓰 Sep 21. 2015

강조메만 있심 됩니더.

정의할 수 없는 무엇의 이름

  수민은 경주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무궁화호 기차를 타기 위해 출발 시간에 맞춰 기차역에 내려왔다. 머리를 식히러 가까운 경주로 바람을 쐬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전역에서 기차가 2분가량 연착되었다는 안내방송이 금방 들렸는데 거기서 3분 더 연착되었다며 죄송하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하루 종일 쉬엄쉬엄 다니긴 했지만 가깝든 멀든 짧든 길든 여행은 여행이어서 해 질 녘이 되니 몹시 피곤했다. 어서 기차를 타서 드러눕듯 몸을 싣고 싶은데 자꾸 지연이라니.


  "저 학생아, 전화할 줄 알지예?"

  뒤편에서 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굴  향해하는 말인지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할머니는 다시 말했다.

  "거 퍼런 가방 맨 학생 말이다, 그래, 니."

  그제야 수민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저 말씀이세요?"

  "그래, 전화할 줄 알지예?"

  "그야 당연히 할 줄 아는데..."

  "그라모 이것 쪼매 봐보이소. 강조메한테 내가 전화를 할끼라예."

  "강조메요? 강조..어메? 강조미?"

  "아 글쎄 강조메만 있심 됩니더."


  수민은 엉겁결에 할머니의 폰을  넘겨받았다. 5년 전쯤 사촌들과 함께 돈을 모아 할머니께 사드린 폴더폰과 같은 기종이었다. 통화버튼과 문자 버튼이 대문짝만 하게 보이고 화면에도 글씨가 커다랗게 뜨는, 어르신들을 위한 기본적 기능만 있는 폰이었다. 수민은 전화번호부에 들어가 사람 이름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강조 뭐시기를 찾기 시작했다. 뒤엣말은 여전히 몰라도 '강'으로 시작하는 건 확실하니 순서대로 훑어 보았지만 강은커녕 'ㄱ'으로 시작하는 이름도 없었다.

  "할머니, 강조메가 없는데요?"

  "하이고 답답시러버라. 강조메라고예, 강.조.메."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강조메는 무조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전화번호부의 목록 전체를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목록 전체라 해봤자 예닐곱 명의 이름뿐이었다. 수민은 그 이름을 하나하나 읊으며 어느 사람이 강조메냐고 묻기 시작했다.

  "외서딸, 낙안큰딸, 작은딸, 큰며느리, 안집감만.."

  연신 아니라고 외치던 할머니는 마지막 남은 '작은며느리'를 말하자 "그래, 거 있다 했지요 내가. 가가 가요. 강조메."라며 흐뭇해 했다.

폰을 돌려주려는데 할머니는 얼른 받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가가 어떤 안지 알면 학생은 아마 식겁할긴데. 내가 구구절절해줄라케도 지금 시간이 없소."

  "예, 애석하네요."

  "예섭이? 우리 손주 이름은 어떻게 알았는교? 강조메를 아는가?"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수민은 폰의 통화버튼을 가리키며 물었다.

  "통화하실 거예요? 누를까요?"

  "그라이소. 그래야제."

  할머니는 폰을 받아 귀에 대고, 돌아서는 수민을 향해 몇번이나 "고맙소"를 외쳤다.


  친할머니와 비슷해 보이는 연배였으니 칠십 대 후반에서 팔십 대 초반쯤 될 것 같았다. 하얗게 샌 머리와 곱게 차려입은 모습. 핸드폰 전화번호부에는 딸과 며느리의 번호가 있고 아들과 사위의 번호는 없다. 할머니는 강조메라고 부르는 작은며느리를 아끼는 눈치다. 손주 이름은 애석하게도 예섭이다. 할머니는 자기만 알 수 있는 암호처럼 전화번호를 저장해놓았다.


  예정된 시간보다 5분 늦게 도착한 기차에 오를 때 저 멀리서 환청처럼 들려오던 목소리를 수민은 분명히 들었다.

  "거 총각, 전화할 줄 알지예?"

  메아리처럼 강조메 강조메 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수민은 계획대로 드러눕듯 의자에 몸을 싣고 잠이 들었다.


  "가가 어떤 안지 알면 학생은 아마 식겁할긴데. 내가 구구절절해줄라케도 지금 시간이 없소."

  "할머니, 아까도 시간 없다고 하셔 놓고 다른 아저씨한테 또 강조메 찾아달라고 하시는 거 다 봤어요."

  "그래 내가 가가 하도 자랑시러워서 그런다이요."

  "그러니까 어떤 분인지  이야기해주세요."

  "몬합니더."

  "왜요?"

  "괜히  잘못했다가 우리 강조메 닳으면 어쩔깁니꺼. 됐심더. 강조메만 있심 됩니더."


  단잠을 자고 부산역에 도착한 수민은 집을 향해 가면서 강아지를 봐도 강조메가 떠오르고 강변카페라는 간판을 봐도 강조메가 떠올랐다. 강조메란 그런 걸까. 입밖에 내뱉는 것만으로 금세 닳아버릴까 봐 아껴도 아까운 존재, 그러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강조메를 찾아달라고 외치던 할머니 역시 정작 찾지 못한 무엇.

집으로 돌아온 수민은 다시 떠나고 싶어 졌다. 정의 내릴 수 없는 그 무엇을 찾으러.

매거진의 이전글 어제와 오늘의 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