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 시간 없이 치료실로 들어갔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다른 구역, 구분된 공간. 빨간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중증 응급환자 구역’이라고 씌어 있다. 순간 접수처에 붙어 있던 안내문이 생각났다.
“응급실은 접수 순서가 아니라 중증 환자 순서로 진료를 봅니다.”
‘우리 아이가 중증 환자구나.’
병원은 치료를 위해 아이의 병명을 정확히 해야 했다. 딸음 음독자살을 시도한 청소년으로 분류된 듯 보였다. 인상이 푸근해 보이는 의사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상황을 좀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타이레놀을 열세 알 먹었대요. 며칠 전에도 일곱 알 먹었다고 했어요. 6개월 전쯤 죽고 싶다는 일기를 썼고, 샤프로 손목을 긋는 자해를 몇 번 시도했다고 했어요. 지금은 심리 상담을 받는 중이에요. 약을 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최대한 사실만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이럴 때 감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정이 넘쳐봤자 생각도 행동도 멈춰버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집에는 아이들이 있고, 내일 출근을 해야 한다. 딸의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그러니 올라오려는 감정은 꽉 묻어두어야 한다. 일단 넣어두자. 일이 잘 해결된 후에 그때 감정 주머니를 다시 풀어 들여다보자.
나는 특이하게도 문제가 생기면 감정을 모두 삭제해버린다. 아니, 감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부모님의 잦은 다툼으로 항상 우울했던 나는 사소한 일에도 상처를 받고 잘 울었다. 눈물은 나의 유일한 감정 해소법이었으니까. 그러다 눈물로도 해소되지 않는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로부터는 감당할 수 없으면 감정을 숨기고 차가운 척한다. 아마도 어린아이가 본능적으로 택한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 것일 테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아이를 보러 갈까요?”
“안녕. 지금 기분이 어때? 선생님한테 얘기해줄 수 있어?”
“네.”
친절한 선생님의 말투에 안도가 되었는지 잘 대답했다.
“약은 언제 먹은 거야? 타이레놀도 종류가 여러 가지라 어떤 걸 먹었는지 모르겠네?”
“제 가방에 약 있어요.”
가방에서 꼬깃꼬깃해진 작은 빨간색 갑을 꺼냈다. ‘타이레놀 500’이었다.
“약은 왜 먹은 거야?”
“힘들어서요. 머리도 아프고.”
“그래, 검사 좀 해보자.”
아이에게 이런저런 장치가 끼워지고 여러 검사가 이어졌다.
“여기 앉으세요.”
선생님이 옆의 의자를 빼주셨다. 선생님의 손에는 ‘독극물’이라는 제목의 두꺼운 책이 들려 있었다. 아득해졌다.
“아이가 먹은 건 타이레놀 종류 중에서 가장 센 거예요. 열세 알이면 기준치를 훨씬 초과해서 간에 손상이 올 수도 있어요. 당장 나타나는 게 아니라 점차 나타나는 증상이라서 2~3일간 계속 검사하면서 지켜봐야 해요. 타이레놀에는 독성이 있는 아시트아미노펜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는데, 여기 책에 보면 다행히 여기에 맞는 해독제가 있어요. 해독제를 투입하면서 경과를 지켜보도록 하죠.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상태가 안 좋아질 수 있으니까. 일단 오늘은 응급실에서 경과를 보고 내일 상황을 봐서 수시로 확인 가능한 중환자실로 보낼게요.”
중환자실이라니. 의식 없는 환자들이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는 데 아닌가? 내 딸이 그런 위중한 치료실에 가야 한다니. 멍하니 앉은 채 가슴 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잔뜩 긴장해 굳어 있다가 간간히 작은 숨을 내뱉었다. 무서운데 무섭다 말할 수 없이 입이 바짝 말랐다. 슬프지만 슬퍼할 수도 없어 눈만 부릅떴다.
하얀색 병원 벽과 의사 가운. 빨간색의 응급이란 글자와 타이레놀의 빨간 갑. 하얀색과 빨간색이 빠르게 깜박였다. 아, 마음이 고장 났구나. 내일은 출근 못 하겠네. 내일 하루만 넘기면 그다음 날부터는 설 연휴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늦은 시간이지만 일하는 유치원 원장 선생님께 문자라도 남겨야지.
문자 창을 여니, 명절 보너스와 선물을 받고 기분 좋게 퇴근해서 보낸 감사 문자가 보였다. 그 아래로 나는 아이의 소식을 전했다.
아이가 약을 많이 먹어서 응급실에 왔어요. 경과를 지켜봐야 해서 내일 출근이 어려울 것 같아요. 약을 먹은 게 걱정되지만, 밝은 아이니 사춘기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자기 몸을 아끼고 사랑하면 좋을 텐데. 기도 부탁드려요.
따뜻한 답이 왔다.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아이들이 사춘기도 심하게 와요. 하연이 큰일 없을 거니까 원감님 너무 걱정 마시고, 힘내고 기도하세요. 저도 함께 기도할게요.
그리고 길게 하연이를 위한 기도문을 보내주셨다. 잘 여미고 있던 감정 주머니가 툭 풀렸다.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아팠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어서 버거운 마음이었는데, 잠깐 기대어 쉴 수 있는 곳을 찾은 느낌이었다. 원장님 덕분에 무거운 마음 한 자락 걷어내고 일어서서 아이에게로 갔다. 나는 엄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