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예민함은 극에 달했다. 학교는 두발자유, 복장 자유였다. 긴 생머리에 흰 티셔츠를 주로 입고 다녔다. 168cm. 48kg. 하얀 얼굴과 오뚝한 코, 깊은 쌍꺼풀, 가슴까지 오는 찰랑거리는 생머리. 내 껍데기는 아름다웠다. 눈웃음과 깊이 패이는 보조개는 남자들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거 같았다. 선배들이 동아리 홍보로 1학년 교실을 투어 했다. 얼굴이 하얗고 코가 오뚝한 신입생에 대한 소문은 전 학년으로 퍼졌다. 교문 앞 놀이터에 한 명, 언덕 아래 골목에 한 명, 집 앞에 편지를 들고 서있는 아이까지 집으로 가는 길이 만리였다. 서성이던 아이가 돌아갈 때까지 나는 집 앞에 숨어있었다. 남자 선배가 뒤쪽에서 얼굴을 불쑥 내밀면 속절없이 주저앉아 울었다. 책상 서랍에서 발한 이름 없이 절절한 편지를 어찌할지 몰랐고, 선물은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다.
체육대회에 내 사진이 500원에 거래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소문은 바로 확인되었다. 편지가 왔다. 편지 한 장에 내 사진이 딸려 나왔다. 나는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온몸이 소금에 절여지는 것 같았다. 편지에는 왜 사진을 찍었는지, 나에게 사진을 왜 보내는지 영웅담을 들려주듯 적혀있었다. 남성의 자만은 더러운 쓰레기 같았다.
어느 날 교회 오빠가 편지를 전했다. 친구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 학교 매점에서 만나잔다. 그것도 점심시간에. 학교 매점은 남녀 건물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오작교다. 점심시간이면 빵과 사발면을 사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매점에 인기남이라도 뜨면 그 소식은 바로 여 교실로 전해졌다. 그 팬들은 우르르 몰려가 작품을 감상하며 매상을 올렸다. 학교 매점은 그런 곳이었다. 하필 거기서 만나자고? 이름을 듣고 기겁했다. 우리 반 애가 짝사랑하는 선배였다. 시끄러운 무리에서 덩치를 담당하는 그 애의 짝사랑 OOO. 짝사랑 선배가 체육을 하는 날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우리 교실에서 운동장이 훤히 보였다. 시끄러운 무리가 창문에 매달려 선배를 쫒는다. "저기 있다. 저기. 캭~~~~ 어떻게. 여기 봤어. 저 키 큰 것 좀 봐. 너무 멋지지 않아? 어떻게. " 이름을 하도 불러대는 통에 길에서 그 이름이 들리면 돌아볼 정도였다. '키만 멀대같이 크고, 슬램덩크 빨간 머리 강백호를 닮은 저 얼굴이 뭐가 좋다고 난리야' 했는데 하필 그 오빠라니. 시끄러운 아이는 말하곤 했다. “ 우리 오빠 건드리지 마. 다 죽어.” 나는 죽는 건가. 조용히 수습하려 했는데 어찌 알았는지 우리의 매점 만남은 전교에 퍼졌다. 거절해도 죽는 거다. 올게 왔다. 무리 중 하나가 나를 불러냈다. 태연하게 따라갔지만 심장이 마구 뛰었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뒷문 계단 아래로 가니 가운데 덩치를 기준으로 양 옆에 그 무리가 쪼르륵 서 있었다.
“야. 너 우리 오빠 좋아해?”
그 애는 얼굴은 하얗지만 날씬하지는 않았다. 두 손을 허리에 걸치고 턱을 쳐들고 눈을 아래로 흘기며 오른발을 내 앞에서 까딱거리고 있었다. 턱을 들이밀 때마다 배도 불쑥 나와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안 좋아한다고.”
내 껍데기를 벗어서 입혀주고 싶었다. 적당히 잘 거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눈을 한번 더 흘기더니 실룩거리며 교실로 사라졌다. 우리 오빠 상처 안 받게 잘 말하란다. 시끄러운 아이는 착했다. 많이 시끄러울 뿐. 약속을 지켜주기로 했다. 매점 만남은 일이 커졌고, 결국 시간과 장소를 옮겼다. 어려운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학교 앞 놀이터로 갔다. 당신은 멋진 선배지만, 친구가 짝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며 친구의 이름까지 언급해주었다. 훌륭했다. 숙제를 마치고, 무서운 마음을 쓸어내렸다.
내 몸을 저주했다. 내 얼굴이 싫었다.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 말은 나를 만지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내 생각, 내 마음 따위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내 몸을 탐하는 음흉한 계략으로만 들렸다. 사람들은 예쁜 사람에게 관대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친절했고, 무시하지 않았다. 나를 함부로 대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예뻐 보이게 꾸몄다. 나를 흠모하되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벽을 세우고 도도하게 다녔다. 절대 누구도 허락 없이 내 몸을 자기 것처럼 취급하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썼다.
남자에게 흔히 있는 남성성. 그 특징이 없는 남자를 좋아했다. 남자의 쾌쾌한 냄새가 나지 않고, 거친 모습도 없고, 친절하게 말하고, 가늘고 섬세한 남자들이 좋았다. 그 남자들과의 스킨십은 좋았다. 안전했고, 나를 쓰다듬는 손길에 존중과 사랑을 느꼈다. 탐하는 손이 아니라 함께 설레는 손이었다. 가만히 안고 있을 때 느껴지는 안정감이 좋았다. 그렇지만 거기까지 였다.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없었다.
해피봉이 나타났다. 이상했다. 처음 보는 종이었다. 그는 당당했고, 멋졌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 같았다. 휴머니즘. 그런 건가. 영혼의 만남이 이런 걸까. 내 영혼도 여성도 남성도 아닐지도 모른다. 영혼이 영혼을 만난 거라고. 자유로움과 당당함, 세상을 품을 거 같은 후덕한 웃음이 좋았다. 힘찼다. 누구보다 강해 보였고, 자신의 것을 소중히 지킬 수 있는 사람 같았다. 존중을 알았고, 사랑에 수줍었다. 그런 그가 좋았다. 이런 게 첫눈에 반한다는 건가? 유리집 소녀가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드디어 관심을 보였다. 소녀의 순결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동창회에서 알 수 없는 질투로 나대는 심장만 부여잡았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아이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에 나는 너무 도도했다. 결국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화를 해볼까? 친구 하자고 할까? 그걸 믿겠어? 속보여. 그렇다고 첫눈에 반했다고 할 수는 없잖아. 사귀자고는 더 말 못 하지. 그런 말을 어떻게 해. 이런 자존심도 없느니라고.
결국 메일을 보내버렸다. ‘편한 친구로 지내자고.’ 이미 친구인데 무슨 친구람. 아주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무슨 편한 친구냐고. 이런 망할 손꾸락. 속이 훤히 보이는 글을 쓰면서 말도 안 되는 쿨한 척 이라니. 나는 내일 소멸할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