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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리스러브 이유미 Oct 24. 2021

4. 12살, 전해주지 못한 선물

퍼즐

맙소사. 답장이 왔다. 편한 친구로 얼굴을 보잖다. 야호. 유난히 추웠던 2000년 11월 14일. 새천년이 열리고 있었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계단을 올라갔다. 출구를 나가 50미터 걸으면 그 애가 있다. '어떻게 하면 좋지? 무슨 말을 하지? 어색해 죽겠네.' 걸음걸음 심장소리가 커졌다. 악~~~~ 이러다 터지겠다. 마지막 건물이다. 벽에 기대어 섰다.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몰랐다. 숨을 크게 쉬고, 얼굴을 세차게 두드렸다. 

'다시 보면 실망할 수 도 있어. 그때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던 거야. 늦게 와서 주목받은 게 한몫했을지도 몰라. 착시효과라고 하지. 다시 5학년 똥글이로 돌아와 있을 수도 있어. 그러니 오버하지 마. 쫌.' 너무 과하지도 경직되지도 않은 미소를 몇 번 지어 보이고 다시 출발했다. 

건물 앞에 그 애가 있다. 동창회에서 본 겨자색 재킷을 입고 돌의자에 걸터앉았다. 검은색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리를 쭉 펴서 발끝을 꼬고 이쪽저쪽 두리번거린다. '혼자 있는데 뭐 저리 싱글벙글 이람. 휘파람이라도 불겠군.' 나를 발견했다. 

“안녕”

“안녕”

걸어온다. 심장이 고장 났다. 빼도 박도 못하는 설렘이다. 나에게 주문을 건다. '우리는 친구다. 친구다.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하는 거야.'     

“배고프지. 뭐 먹을까?”     

먹자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볶음밥 좋아해?"

철판볶음밥 간판이 보였다. 코코 후라이드 라이스. 네모 모양 넓은 철판에 김치, 햄, 베이컨, 야채를 넣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볶다가 밥을 넣고 칼질하듯 다진다. 야채와 버무려진 밥에 손을 높이 들어 소금과 후추를 뿌린다. 마지막 간장소스를 철판에 올리면 달콤하고 시큼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밥과 섞어 동그란 접시에 담는다. 특별 소스를 듬뿍 얹어준 볶음밥이 달콤했다.      


"근처에 맛있는 맥주를 파는 곳이 있어.” 그 애가 말했다. 지하로 내려갔다. 어두운 조명과 홀 가운데 나무로 만든 박스에 아무렇게나 꽂아 있는 맥주들이 좋았다. 병이 예쁜 레몬향 맥주를 추천해줬다. 구석 자리에 앉아 병 건배를 하고 한 모금 넣었다. 추운 겨울에 목을 타고 들어가는 시원한 맥주가 기막혔다. 내가 말을 꺼냈다.      

“너 많이 변했다.” 

“그래? 남자는 초등학교 때에 비하면 많이 변하지. 어떻게 변했는데?”

“키도 많이 크고, 얼굴도 동그랬는데 갸름해지고, 얼굴도 좀 변한 거 같고.”

“5학년 때 코 수술을 해서 그런가?”

"코 수술은 왜 했어?"

“내가 너 5학년 때 엄청 좋아했잖아. 크리스마스에 너한테 주려고 선물을 샀거든. 자전거 뒤에 싣고 신나게 갔어. 신호등 앞에 서 있는데 대형 트럭이 내 코를 치고 지나간 거야. 코뼈가 으스러졌지. 나는 그때 알았어. 나는 마취가 잘 안 되는 체질이라는 걸. 엄마랑 형들이 병원에서 나를 붙잡고 으스러진 뼈를 맞추고 하나하나 꿰매는데 진짜 아프더라. 나 울었다.”

“나라도 아파서 울었겠다.”

“아니, 너한테 선물 주러 못 가서.”

황당하고 웃음이 났다.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 아이가 웃겼고, 12살 나의 기억과 그 아이의 기억이 너무도 달라 웃음이 났다.      




12살. 마음이 시리고 아팠던 겨울. 해가 떨어질 때쯤 엄마가 집에 없으면 불안했다. 술을 안 먹고 들어오길 간절히 기도했다. 8시가 넘어가면 기도는 바뀌었다. 아빠가 집에 안 들어오길, 골목에서 엄마가 소리 지르지 않고 조용히 들어오길 바랐다. 아빠는 쓰러진 사업을 일으키느라 바빴다. 엄마 말로는 아빠가 사업 파트너인 다른 아줌마와 살고 있다고 했다. 아빠는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았고 단칸방에서 4남매를 혼자 키워내야 했던 여린 엄마는 그 삶이 버거웠나 보다. 하루 걸러 하루씩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골목 어귀부터 들려오는 소리로 밤에 가려진 집이 하나씩 밝아질 때면 우리 4남매는 창피함을 뚫고 뛰어나간다. 팔다리를 하나씩 잡고 밀고, 끌고, 당기며 집으로 들어와야 했다. 그런 날 아빠라도 들어오면 집안까지 시끄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집을 나갔다. 아무 설명도 없었다. 그날도 엄마가 술을 먹고 늦게 오는 줄만 알았다. 엄마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엄마는 아침에도 없었다. 방바닥이 너무 차가웠다. 할머니 말이 생각났다. 냉골이네. 연탄불이 꺼진 모양이었다. 꺼지기 전에 갈았어야 하는데. 엄마가 집에 없다는 것보다 방이 추운 게 서러웠다. 이 세상에 우리 4남매가 추울까 봐 걱정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게 눈물이 났다. 그렇게 우리는 어른들 각자의 슬픔 속에 버려졌다. '연탄불 갈라고 전화라도 해주지.' 번개탄을 찾아 연탄집게에 꽂고 불을 붙였다. 번개탄 연기는 왜 그리 매운 걸까. 콧물이 나고 눈이 따가웠지만 어디 내려놓을 곳이 없었다. 연탄 위에 번개탄을 올리고 다시 연탄을 올리고 뚜껑을 닫는 동안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다. 밖으로 나가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하늘을 올려봤다. 하늘은 같은데 하늘 아래 우리 집은 다른 집과 달랐다. 나의 12살은 엄마가 없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학교에 가야 했고, 산은 무서웠는데.


그 시간 너는 나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었구나. 비록 전해받지는 못했지만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피가 나고 아픈데도 나에게 선물을 주지 못한 마음이 더 슬픈 네가 있었구나. 나도 울고 너도 울었구나.    


  



숲의 정원에 복숭아 빛 장미가 꽃봉오리를 막 터트리려고 앞다퉈 준비 중이다. 불꽃처럼 열정적인 초록 왕관이 봉우리를 받치고 영광스러운 장면을 기념하고 있다. 나는 네가 터지는 장면을 지켜볼 거야. 찬란한 해가 복숭아빛 볼살을 보드랍게 어루만질 때 툭! 왕관이 미세하게 갈라지고, 여왕이 속살을 내민다. 이미 활짝 피어오른 장미들이 새벽 비를 가득 머금고 반사빛을 내며 축하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 막 피어오른 널 축하해.      

“숲아.”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이 선물을 봐. 이건 보물이야. 내가 12살에 받았어야 할 소중한 마음이야. 내 12살은 슬프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이런 보물이 숨어있었지 뭐야? 나는 어릴 때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무서운 기억들만 있어.”

"이 퍼즐을 줄게."

퍼즐에는 상처 조각들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 비어있는 자리는 뭐야?"

"다른 기억으로 채워봐."

"이 보물을 채워볼래.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

"좋은 생각인데."  

조각을 천천히 끼우자 보물처럼 빛이 났다. 그 빛에 어두운 상처 조각들이 조금씩 작아진 거 같았다.

"숲아. 이거 봐. 다른 조각들이 조금 작아진 거 같아. 여전히 너무도 크지만. 다른 조각을 찾으면 나는 행복해질까?"

"너는 행복해지길 원하니?"

"아마도 그런 거 같아." 

“지금 행복해 보여.”

“지금은 그래. 곧 불행해지겠지만.”

“그 보물은 누가 준거야?”

“해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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