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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 벤치에서

혜진과 현우는 나와 남편의 이름. 이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by 강혜진

기숙사는 학교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일부러 흙을 돋워 이런 높은 곳에 기숙사를 세웠을 리는 없고.

혜진은 어쩌면 예전에 이곳에 작은 언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강의를 들으러 가려면 족히 200개는 넘는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계단 앞으로 좁고 긴 길이 이어지는데 그 길을 따라 50m쯤 걸으면 학떨목이 보였다.

학점 떨어지는 나무. 왜 학떨목인지, 누가 처음에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약속 장소는 학떨목 아래였다.

964_1128_4328.jpeg?type=w580 출처: 진주교대 신문 https://www.cuenew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4

그날, 혜진이 현우를 만나기로 한 곳도 바로 학떨목 아래였다.

개천절이 목요일, 금요일 휴강 공고를 낸 교수님들 덕분에

기숙사 학생들은 모처럼 연휴를 즐기려 짐을 쌌다.

그런데 혜진은 집으로 갈 생각이 없었다.

현우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대학생 새내기 시절, 혜진은 엘리트라는 봉사 동아리에 가입했다.

수화로 공연을 했고 보육원에 가서 주말 봉사 활동을 몇 번 했지만

평상시 동아리 활동은 주로 학교 앞 주점에서 이루어졌다.

1학년 새내기 동아리원이라고는 수학 교육과 동주와 컴퓨터 교육과 혜진,

둘 말고는 없었다.

현우는 2학년 선배 중 한 명이었다.


혜진이 처음 현우를 만난 건 4월 동아리 모임에서였다.

그날도 주점에서 동아리 선배들과 기분 좋게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있던 혜진은

딸랑거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들어 문쪽을 바라보는 순간

힘차게 문을 열고 주점으로 들어오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다른 일정이 있어 늦게 동아리 모임에 참석한 현우 선배였다.

현우는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했으며

커다랗고 두꺼운 뿔테안경 때문에 첫눈에 호감 가는 외모는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 혜진이 생각해 왔던 전형적인 대학생 오빠 같은 현우의 첫인상을 혜진은 잊지 못했다.


또각또각 기숙사 계단을 내려가는 혜진의 발걸음이 다른 때보다 가벼웠다.

태어나 처음 신는 구두였지만 불편함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혜진의 마음은 온통 현우 생각이었다.

혜진이 현우를 만나러 간다는 말에 혜진보다 더 들뜬 혜진의 친구들이

구두, 치마, 카디건, 화장품을 잔뜩 챙겨 혜진을 꽃단장 시켜준 것을

현우는 죽었다 깨어나도 몰랐을 것이다.

학떨목 아래에 선 현우가 짧은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한껏 멋을 부린 건

혜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현우가 보이자 혜진은 친구에게 빌린 구두로 어떻게 하면

더 예뻐 보일지 의식하며 걷느라 걸음걸이가 어딘지 어색했다.


“선배, 오래 기다렸어요?”


이제까지 그를 만날 때마다 혜진은. 늘 동아리 선후배들과 함께였다.

그런데 오늘은 혜진과 현우 단둘이다.

나란히 걷는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라도 흐르면 어색할까 봐

혜진은 쉴 새 없이 추임새를 넣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현우는 그런 혜진이 마음에 들었다.

평소랑 다르게 풀어 내린 긴 머리도,

운동화 대신 신고 나온 구두도,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바뀐 듯한 혜진의 옷차림도 모두.

ChatGPT Image 2025년 10월 25일 오후 05_17_00.png

둘은 개천 예술제가 한창인 남강을 향해 걸었다.

강가에 도착하자 길 양쪽으로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교차로마다 모범택시 기사가 서서 수신호로 교통 정리를 돕고 있었다.

횡단 보도는 인파로 가득했고,

파란불이 끝났는데도 길을 건너는 사람들 때문에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려댔다.

둘 사이에는 아직 어색함이 흘렀고 쭈뼛쭈뼛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그러나 현우는 손을 뻗어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혜진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혜진은 그런 배려가 좋았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

현우에 대한 호감이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둘은 천수교 위에 섰다.

천수교 위에서 내려다보는 남강은 별을 뿌려 놓은 듯 아름다웠다.

색색의 유등이 반짝이는 강에서 둘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현우와 혜진은 둘만 보였다.

보통의 연인들이 하는 것처럼

맛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디저트를 먹고,

돌아오는 길을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딱딱한 구두를 신고 종일 걸었지만 혜진은 발이 아픈 걸 느끼지 못했다.

긴 거리를 걸었지만 현우는 그 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다시 학떨목 아래.

두 사람은 아쉬운 듯 조심히 들어가라는 인사를 나누었다.

혜진이 기숙사 계단으로 몇 걸음 옮기던 순간,

다급히 혜진을 부르던 현우의 목소리.

혜진이 돌아보는 찰나, 어느새 혜진의 눈앞에 서 있는 현우.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줄게.”


나란히 걷는 현우와 혜진의 손이 슬쩍슬쩍 스쳤다.

그리고 현우가 용기를 내 혜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혜진은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걸었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너무 뛰어서 행여 심장 소리가 서로의 귀에 들리지 않을까

숨을 가다듬으며 기숙사 계단을 올랐다.

이 순간만큼은 계단이 200개가 아니라 500개라도,

아니 1000개라도 좋을 것만 같다고 혜진은 생각했다.


둘은 기숙사 앞 벤치에 앉아 강의동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개천 예술제의 전야제를 알리는 불꽃이

저 멀리서 펑펑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둘 사이에 그 어떤 고백의 말 한마디도 없었지만, 둘은 10월 2일. 그날부터 1일이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풀벌레가 쉬지 않고 울어댔다.

혜진과 현우는 불꽃놀이가 끝나고도 한참 그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기숙사 야간 점호 시간은 두 사람의 시간을 가위질이라도 하려는 듯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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