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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Feb 06. 2020

마트를 끊고 생긴 일

가지그라탕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집 앞 마트를 끊었다. 우리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대형마트가 있다. 마트 구경을 좋아하고 자가용이 없는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식품, 생활용품, 화장품, 옷, 책 등 없는 게 없는 마트만 있으면 일상생활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에 든든했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당분간 마트에 가지 않기로 했다. 입지적으로 다른 대형마트보다 사람이 많고 해외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트에 가지 않기로 결심한 후부터는 사야 할 것이 생길 때마다 고민이 많아졌다. 모든 것을 마트에서 해결했기에 다른 곳으로는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항상 퇴근길에 마트에 들렀다. 그런데 마트에 가지 않기로 하니 주변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겨울 내내 소식이 없던 눈이 뒤늦게 내린 2월의 어느 날, 나의 쇼핑리스트는 다음과 같았다:

원두커피

동생이 다음날 아침에 먹을 빵 2개

가지 2개

평소 같으면 퇴근길에 마트 한 번 돌면 끝날 일인데, 이 날 평소와 다른 쇼핑이 시작되었다.


커피숍에서 커피 원두를 샀다. 점심식사 후 시간이 조금 남았다. 아침마다 커피를 한잔 하기 때문에 커피 원두가 항상 집에 구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원두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마트에 저렴한 가격의 각종 원두커피 가루를 팔지만 당분간 마트에 안 가기로 했으니 근처 커피숍에서 사기로 했다. 커피숍 커피는 가격이 비싸서 원두도 고가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특별히 한정판 원두가 아니면 가격이 마트와 큰 차이가 없다. 원두 구매 이벤트로 받은 무료 음료권까지 생각하면 더 저렴하다. 게다가 분쇄된 원두를 유통하는 마트와는 달리 커피숍 원두는 구입 후 매장에서 직접 갈아주기 때문에 향이 남아있다. 핸드드립용으로 갈아달라고 한 원두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후 내내 자리에서 향긋한 원두향이 났다.


유기농 빵집에서 동생이 먹을 빵을 샀다. 회사에 오며 가며 몇 번 봤던 빵집이 갑자기 생각나서 퇴근길에 들렀다. 조그마한 빵가게에 들어선 순간 달달하고 고소한 빵 냄새가 났다. 단팥빵이 유명하다고 하니 단팥빵 하나를 사고 단짠의 조합을 맞추기 위해 치즈빵도 하나 샀다. 유기농 재료로 빵을 만든다고 한다. 같이 사는 동생이 저녁 금식을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하루에 제대로 먹는 끼니가 아침과 점심뿐인데, 그동안 유통기한도 긴 공장에서 만든 빵만 먹게 한 것이 미안했다. 이 빵집은 좋은 재료를 쓴다고 하니 안심이 됐다.

  

동네 슈퍼에서 가지를 샀다. 집에 파스타 소스와 치즈가 있는 것이 생각나서 가지만 사면 가지그라탕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상가 지하에 있는 오래된 슈퍼에 처음으로 가봤다. 포장돼서 나오는 두부가 아닌, 어렸을 때 엄마 심부름으로 많이 샀던 큰 바구니에 담긴 한모씩 잘라서 파는 두부가 보였다. 옛날 생각이 나서 정감이 갔다. 가지 두 개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딱 가지 두 개만 샀다. 마트에 가면 현란한 할인 이벤트가 많아서 사지 않으면 손해인 것 같아 예정에 없던 소비를 많이 했다. 하지만 동네슈퍼에서는 필요한 것만 차분하게 살 수 있었다. 마트보다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이렇게 소량으로 필요한 것만 사는 것이 더 경제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다니던 길을 더욱 관심 있게 살펴보기 시작하니, 작은 사업을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운영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빵은 빵집에서, 커피는 커피숍에서 사는 쇼핑은 더 좋은 맛과 품질을 선사해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소비를 조장하지 않아서 더 경제적이기까지 했다.


동네 슈퍼에서 사 온 가지로 가지그라탕을 만들었다. 마트에 갔으면 가지를 사러 갔다가 저렴한 가격에 파는 치킨에 현혹되어 그 날 저녁에는 치킨을 먹고 가지는 기약 없이 냉장고에 넣어뒀을 것이다. 동네슈퍼에는 갓 튀긴 값싼 치킨 같은 것은 없으니 계획대로 천오백 원을 주고 가지를 두 개를 사서 가지그라탕을 요리했다. '에그플랜트 파르미지아나(Eggplant parmigiana)'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태리 요리지만 약식으로 만들면 간단하다.



가지그라탕 (1인분)


재료

가지 1개, 시판 스파게티 소스 한 컵 정도, 피자치즈 100g, 슬라이스 체다치즈 1장, 올리브유(또는 다른 식용유), 소금, 파슬리가루(선택)


만드는 법

1. 가지를 1cm 이하 두께로 얇게 썰어준다. 올리브유를 두른 팬에 가지를 앞뒤로 굽고 소금 간을 살짝 한다.

2. 그라탕기 바닥에 숟가락으로 스파게티 소스를 한 두 숟가락 펴서 바르고 구운 가지를 한 층 올리고 피자치즈와 잘게 자른 슬라이스 치즈를 얹는다. 그 위에 또 스파게티 소스, 가지, 치즈 순으로 얹는다. 가지를 다 사용할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한다.

3. 마지막으로 파슬리가루를 뿌리고 (바삭한 식감을 좋아하면 이때 빵가루를 뿌려도 된다) 180도 오븐에 20분간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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