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직장을 옮겼다. 프리랜서가 많은 통번역사라는 직업을 생각하면 상당히 긴 시간 동안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 남겨지는 것에 익숙해졌을 때쯤 나에게도 길이 열렸다.
나는 많은 것들이 느렸다. 고등학교 때는 마음먹고 공부하기까지가 느렸고, 대학교 다니면서는 진로를 정하는 것이 느렸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다른 동기들에 비해 취업이 느렸고, 취업 후에는 이직이 느렸다.
이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다. 하루는 전 직장에서 친했던 동생이 자신이 계획하는 일이 생각처럼 빨리 진행되고 있지 않아 답답하다고 고민상담을 했다. 나는 나의 느린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그랬더니 그 동생이 나에게, "느리게 가지만 잘 가잖아요"라고 말했다. 순간 코 끝이 찡했다. 위로해주려다가 내가 위로를 받았다.
직장에서 나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받는 칭찬 중 하나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이다. 기다려야 해서 답답한 순간들이 많았지만 어떻게 중심을 잃지 않고 올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우리 아버지를 보고 배운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천천히 가도 방향을 잃지 않는 분이다. 아버지의 방향은 결국 가족이었다. 능력도 하고 싶은 것도 많으셨을 텐데 가족이 희생되는 순간에는 항상 가던 발걸음을 멈추셨다. 그리고 남들보다 느리게 가더라도 잘 가는 방향을 택하셨다.
이런 성품 때문인지 아버지는 잼을 잘 만드신다. 요리 좋아하는 나도 잼을 만드는 인내심을 수양하기란 쉽지 않다. 과일이 가장 맛있는 잼의 상태가 될 때까지 계속 바라보고 기다려주고 저어줘야 한다. 아버지는 그 시간을 묵묵히 기다려서 결국 맛있는 잼을 만들어내신다.
우리 아버지 딸인 나는 느리게 가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발효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발효빵을 만드는 일은 최소 3시간은 투자해야 하는 긴 여정이다. 아무리 줄이고 싶어도 줄일 수 없는 발효 과정이 있다. 발효를 충분히 하지 않으면, 또는 너무 해버리면 빵은 맛이 없어진다.
빵을 만드는 것은 나의 기다림의 시간과 같았다. 너무 급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기다림에 지쳐 모든 것을 놔버리면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 무용지물이 되기에 긴장감을 놓을 수도 없었다.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그 시간을 잘 보내고 나면 그 보상은 맛있고 든든했다.
이직을 해도 또 기다리는 것이 있다. 우리는 평생 무엇인가를, 또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기다림을 끝내려고 하기보다 받아들이고 같이 가는 법을 배워봐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빵을 구워서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귤 마말레이드를 발라서 먹어본다.
기본 발효빵
발효빵의 기본재료는 '밀가루, 물, 설탕, 소금, 인스턴트 드라이이스트'이다. 기본 과정은 '반죽-1차 발효-성형-2차 발효-굽기'이다. 웬만한 빵은 여기에 재료나 과정을 조금씩 추가하거나 변형해서 만든 것이다. (버터나 계란을 추가하거나, 물 대신 우유, 설탕 대신 꿀을 넣거나, 반죽에 견과류를 넣는 등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지만 기본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재료
강력분 밀가루 200g, 물 120ml, 꿀 1Ts, 소금 1ts, 인스턴트 드라이이스트 1ts
*Ts=15ml, ts=5ml
만드는 법
1. 소금과 꿀-물-강력분-이스트 순으로 제빵기에 넣고 반죽과 1차 발효까지 마친다. (이스트가 처음부터 설탕이나 꿀 등 당류와 접촉하면 안 되기 때문에 제빵기에 재료를 넣을 때 순서에 유의한다.)
2. 반죽을 꺼내고 종이호일을 깐 평평한 공간에서 밀대나 손으로 반죽을 평평하게 편다. 민 반죽을 손으로 돌돌 말고 마지막 부분을 손가락으로 꼬집어 여며준다.
3. 여민 부분이 밑으로 가도록 반죽을 돌리고 약 50분 동안 반죽이 1.5배 정도로 부풀 때까지 2차 발효를 한다. (발효할 때 반죽을 밀폐시켜야 한다. 랩이나 넓은 그릇으로 덮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냥 반죽을 전원을 켜지 않은 오븐에 넣어둔다.)
4. 발효가 끝나면 원하는 모양으로 칼집을 넣고 200도 오븐에 20분 동안 굽는다. (오븐의 화력에 따라 굽는 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 화력이 좋으면 15분 만에도 완성이 되니, 빵의 표면 색깔을 보고 타기 전에 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