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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Feb 29. 2020

젤라또와 르누아르

자매의 파리에서 삼시세끼: 네 번째 식사

"언니, 정말 여행하면서 나 때문에 힘든 것 없었어?"


"음...... 아니 없었는데?"


정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행하면서 힘든 일이 생기기 마련인데, 여동생과 함께 파리를 여행한 일주일 동안 힘들지 않았다. 물론 많이 걸어서 발이 아팠고, 날씨가 생각보다 쌀쌀했지만, 동생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다. 여동생과 떨어져서 지낸 지난 십수 년의 시간 동안 생각과 생활방식 서로 많이 달라졌을 텐데, 같이 간 여행에서 불편한 일이 없었다는 것은 참 이한 일이었다.


여동생은 미술을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파리에서 미술관 가는 것이 우리 여행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처음에 간 미술관은 오르세 미술관이었다. 책에서만 본 유명한 작품들을 실제로 보니 정말 신기했다. 그중에서 특별히 눈에 들어온 작품이 있었는데,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의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녀들(Jeunes filles au piano)'이었다. 평소에도 색감이 예쁘다고 생각했던 그림이었지만, 이 날 이 작품이 유독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림을 본 당시의 내 마음을 너무나도 잘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림 속 피아노 앞에 있는 두 소녀가 파리 여행을 온 우리 두 자매 같았다.



르누아르는 예쁘고 즐거운 순간만을 그림에 담았다고 한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계속된다"는 말을 하기도 한 르누아르는, 세상에는 이미 슬픈 일이 많으니 행복한 순간만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힘든 경험과 기억들이 나를 성장시키는 데 더 유익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소에 이 말을 들었으면 그냥 어떤 쾌락주의자가 한 말로 듣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날은 달랐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며 크게 공감했던 이유는, 그 순간 내가 그림 속에 있는 소녀들처럼 정말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나와서 잠시 쉬다가 오랑쥬리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미술관 근처 공원에서 파는 젤라또를 먹으러 갔다. 제일 작은 쁘띠 사이즈를 콘으로 달라고 주문을 했더니 세 가지 맛을 고르라고 했다. 세 가지 맛을 골라서 얘기를 하니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얇게 떠서 콘 위에 꽃잎 모양으로 얹어주었다. 르누아르 그림같이 밝고 예쁜 색상의 아이스크림을 장미 모양으로 만들어 꽃을 주듯 건네주니 또다시 행복감이 찾아왔다. 맛도 내가 먹어본 젤라또 중에서 가장 상큼하고 행복한 맛이었다.



한 허프포스트(HuffPost) 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우울할 때 아이스크림을 먹는 이유 중 하나가 아이스크림은 주로 좋은 기억과 연관이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떠오르는 행복했던 순간들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픈 기억을 통해 성장하기도 하지만, 좋은 기억이 가지는 힘도 확실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고, 예뻐야 한다"라고 말한 르누아르는 이런 좋은 기억의 힘 믿었던 것이 아닐까.


동생과 젤라또를 먹 후 오랑쥬리 미술관에 가서 르누아르의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녀들'의 화 스케치 버전을 감상했다. 이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힘든 일들이 생기고,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들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울할 때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듯 한 폭의 르누아르 그림같이 쁘고 즐거웠던 우리의 파리 여행을 기억 속에서 꺼내 곱씹으며 힘든 시간을 과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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