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뛰어서 행복합니다
회사 동료에게 추천을 받아서 첫 트레일러닝 대회를 나갔다. 태백을 뛰는 사람들처럼 본격적인 트레일러닝이라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내가 평소에 오르기 좋아하는 인왕산과 북악산 근방을 뛰는 코스라고 해서 10킬로미터 종목을 신청했다.
인왕산은 몇십 번을 올랐을 정도로 좋아한다. 한 시간 안에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고, 오를 수 있는 길도 여러 가지라 다른 길을 택할 때마다 또 다른 풍경을 볼 수가 있다. 여름이 다르고 겨울이 또 다르다. 익숙한 산을 끼고 뛴다고 하니, 첫 트레일러닝 대회로 도전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비가 와서 촉촉했던 산은, 미끄러질 우려가 있어서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싱그러운 풀냄새가 가득했다. 시원한 산공기를 마시며 북악산을 올랐다. 대회 전에 넘어져서 다친 부상 때문에 빨리 뛰지는 못하고 앞서 뛰어가는 사람들을 보내주고 천천히 풍경을 구경하며 코스를 걷다가 달리다가 하였다. 트레일러닝 대회는 도로를 달리는 로드러닝과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 거리가 참 안 늘어난다. 스마트워치의 거리가 생각만큼 빨리 올라가지 않아서 처음에는 산이라 GPS가 잘 안 잡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확했다.) 이 정도 힘이 들면 멀리 왔어야 하는데, 오르막 내리막을 왔다 갔다 하니 힘든 만큼 거리가 늘지 않아서 인내심이 필요했다.
- 고개를 들고 앞을 보고 달려야 하는 로드러닝과는 달리, 발 쪽을 내려다봐야 하는 경우가 많다. 바닥에는 낙엽과 나뭇가지들이 있고, 지면이 고르지 않아서 내가 밟고 가는 지면이 어떤지를 미리 확인하고 뛰어야 한다. 불확실성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 다른 사람들을 제치는 것보다 서로의 안전을 확인해 주는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 로드러닝보다 부상의 위험이 더 있는 만큼, 함께 뛰는 사람들끼리 다른 사람들이 다치지는 않을까 서로 살피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분위기가 혼자 대회에 참석한 나를 안심시켰다. 실제로 트레일러닝 대회규정에는 다친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행위에 대한 페널티가 있다.
기록을 위해 트레일러닝을 달리는 사람들도 물론 있지만, 로드러닝에 비해 전반적으로 기록보다는 산을 뛰는 경험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같아서 조급함이 없어 보였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완주한 첫 트레일러닝 대회 후 친한 학교 동기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 오랜만에 욕심내지 않고 온전히 즐겼던 달리기여서 행복했다.
"역시 넌 운동하고 나서 만날 때가 제일 재미있어."
동기에게도 내 행복이 보였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