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마리나베이를 달리다

천천히 달려서 행복합니다

by Jeannie

친한 친구와 싱가포르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친구가 자고 있을 때 새벽에 일어나 호텔 근처 달리기를 했다. 마리나베이(Marina Bay)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숙소가 있어서 호텔 근처만 달릴 수 있었고, 다음에 싱가포르에 오게 되면 마리나베이를 꼭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리나베이 지역은 수변산책로를 따라 아름다운 건물들이 있는 싱가포르의 명소이다. 달리기 버켓리스트 중 하나로 이 지역을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싱가포르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숙소가 마리나베이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출장 일정이 여유가 있지는 않았지만, 이런 기회가 또 없겠다 싶어서 잠을 줄여서라도 뛰자고 생각을 했다. 회의는 오전 열 시, 호텔에서는 아홉 시 반쯤 출발할 예정이라 오전 7시에 일어나서 바로 뛰러 나가기로 하고 알람을 맞췄다. 자기 전에 마리나베이 러닝코스가 3킬로미터 조금 넘는다는 것과 러닝코스를 달리면서 보게 될 건물들에 대해 미리 숙지를 해두었다. 러닝을 하면서 아름다운 랜드마크를 만날 때 그 랜드마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으면 러닝의 즐거움이 배가 되기 때문이다.


아침에 알람이 울렸다. 물세수만 하고 옷을 입고 출발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카톡이 왔다. 같이 출장 온 동료가 그 전날 나의 러닝 계획을 듣고 같이 뛰고 싶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러닝메이트가 생기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그 동료는 러닝을 거의 해보지 않은 사람이고,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누구의 페이스메이커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혹시나 내가 이 사람을 다치게 하면 어떡하지 걱정이 되었다. 무리하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이 사람의 출장 컨디션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동료와 만나서 마리나베이로 걸어갔다. 싱가포르의 날씨는 언제나 뜨겁고 습하다. 그래서 다소 덥기는 했지만, 아침이 주는 상쾌함이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마리나베이에 도착하니 이미 그곳에는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키 광고에서나 나올 법한 몸과 러닝자세를 가진 사람들을 감격하며 구경하면서 우리도 천천히 달리기를 시작했다.


나에게 러닝을 가르쳐준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가르침을 떠올려보았다. 친구는 나에게 맞는 페이스를 찾아서 맞춰서 달려주었고, 내가 지루해할 까봐 전날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해주며 나의 달리기를 즐겁게 해 주었다. 물론 나는 숨이 차서 간단한 "응"을 제외하고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액션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깃거리들을 풀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마리나베이 러닝메이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전날밤 알아둔 랜드마크들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처음 만난 건물은 레드 닷 박물관(Red Dot Design Museum)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인 공모전인 레드 닷 어워드의 수상작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다. 우리나라 수상작들도 꽤 있다고 들었다. 박물관 이름처럼 건물 입구가 빨간색이었다.


그다음에 나온 건물은 루이뷔통 매장 건물이다. 물 위에 떠있는 것 같이 생겼고 건물 외관에 크게 "LV"라고 표시가 되어 있다. 출장일정이 끝난 후 싱가포르 측 파트너들도 그 건물이 유명하다며 구경시켜 주었다. 꼭 거기서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건물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좋은 볼거리라는 것이다. 건물을 구경하는 김에 물건을 사기에는 가격이 만만찮은 것도 사실이고.


더 뛰다 보면 헬릭스 다리(Helix Bridge)를 건넌다. 다리 위에 서 있으면 마리나베이가 한눈에 들어와서 숨통이 트이고 아름다웠다. 뛰어온 거리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뛰어서 뿌듯하다.



다리를 건너면 에스플러네이드 극장(Esplanade - Theatres on the Bay)이 나온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연상시키는 건물이다. 뾰족한 가시가 난 거북이 등같이 생겨서 두리안 같다고들 한다.


마지막에 보이는 것이 멀라이언 파크(Merlion Park). 상반신은 사자, 하반신은 물고기를 한 가상 동물로 싱가포르의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인 멀라이언을 보는 순간 오늘 러닝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멀라이언을 마지막으로 보고 출발점으로 돌아와서 3킬로미터 조금 넘은 마리나베이 러닝을 마쳤다.



"저의 러닝메이트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멋있게 마무리 멘트를 날렸다.

"......"

대답이 없다. 숨이 많이 찬 것 같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동료는 나중에 다른 출장지에서도 뛰어본 후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마리나베이 같지는 않았다고 했다. 예의상 한 말이든 진심이든 그 말이 고마웠다. 나도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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