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mewhen Feb 15. 2017

환상, 우연과 구성 사이

연애법 여덟째

    우리는 연애에서 환상(fantasy)이 일어나길 바라며, 연애가 환상적이길 바란다. 연애가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는 팍팍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환상이 펼쳐지는 장소가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애에서 이따금 목격하는 환상을 증거로 지금의 연애가 특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상대에 대한 평가와 필연적으로 이어진다. 연애의 의미를 결정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변수는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연인’이기 때문이다. 곧 환상은 연애를 특별하고 신비한 장소(시간과 공간의 통일태)로 만들며, 이로써 이 장소의 지배자이자 동반자인 연인을 특별하고 신비한 존재로 자신에게 자리매김하도록 만든다. 요컨대 환상은 연애와 연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요인이다.




    운명, 기적, 우연. 어떤 힘에 이끌리거나, 의도와 관련없이 어딘가에 닿게 되는 어떤, 무엇.



    연애에서 환상은 현실에 발붙인 것이라고는 "연인이 곁에 있음"뿐이라는 믿음이 자리잡은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연인이 곁에 있음조차 믿기지 않는 환상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연인의 자리는 환상에 내어줄 수는 없다. 연인이 차지한 자리의 부재(소멸)은 환상을 완전한 허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연애에서 환상을 이와같이 이해할 때, 환상은 우리의 손에서 벗어나 통제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 상태에서 환상은 나타나주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과연 연애에서 환상을 내 손에서 벗어난 상태로 두어도 될까? 환상이 내 손을 벗어나서 존재할 때, 좋은 연애를 만들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환상에 대한 이와같은 인식은 연애의 통제불가능 영역을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가 연애에서 환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은 연인을 알게 된 경로뿐이다. 어떤 만남이건 그 처음은 우연일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연인이 되었을 때 우연은 회고적으로 환상이 될 수 잇다. 하지만 우연, 궁극적으로 환상은 거기까지다. 무관심할지, 친구가 될지, 연인이 될지는 모두 선택이며 나와 당신의 통제범위 내에만 존재한다. 왜 그를 선택한 것인지에 관한한 "때"와 "공간"이 강한 영향력 - 어쩌면 인과력(causal power) - 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관계의 질(이름)을 결정하는 힘은 연인 각자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상을 통제불가능 영역에 두는 것은 적어도 또 하나의 불확실성 영역을 두는 것과 다름없다.




    불확실성의 영역 : 1) 상대와의 만남 + 2) 환상이라는 통제불가능 영역



    불확실성이 연애를 반드시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찾아오는 기쁨은 때때로 더 큰 의미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확실성을 통제할 수 있다면, 환상이라는 이름의 기쁨조차 연인들의 손에 쥐어줄 수 있다면 연인들은 연인은 안정화할 수 있는 힘과 연애를 윤기있게 하는 환상으로서의 세렌디피티(serendipity)를 생산할 수 있는 힘을 동시에 갖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불확실성의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상에 대한 인식 전환은 연애를 보다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이러한 인식 전환은 비단 환상에 대한 재해석만은 아니다. 이것은 환상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 속 과정을 어쩌면 더 잘 나타내고 있는지 모른다. 곧 연애에서 목격되는 다양한 양상을 환상이라고 이름붙이고, 의미있는 사건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것을 환상이라고 결정하는 나와 연인의 선택인 것이다. 우연하더라도, 우연하다고 믿는 것조차 우리 안에서 구성된 믿음일 뿐이다.


    환상은 구성적 믿음이며, 환상을 구성하는 힘은 자신이 갖는다. 항상 “나”(연인관계인 각자)만이 관계의 양상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갖듯 환상이 연애에서 존재하고, 환상으로 연애에 윤기를 더하도록 역할을 부여하는 힘 역시 내가 갖는 것이다.* 연애에서 환상은 연애의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대상과 벌어지는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가 존재한다고 스스로 믿을 때에만 비로소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환상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라, 환상을 어떻게 구성하고 존속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 된다.

(*물론 나의 의도가 결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의도한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현실화되지 못한다.) 


    환상은 "연인"과 "연애 자체"에 대한 관찰(observation)로부터 구성되기 시작한다. 관찰은 단순히 현상을 표면을 인지하는 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현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실체와 특징을 찾고,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활동이 관찰이다. 곧 계단을 보았을 때, 계단이네가 아니라, 저 계단은 몇개의 층계로 되어있고, 재질은 무엇이며, 몇 번째 계단에는 깨진 듯한 자국이 있는 것을 확인하는 일종의 셜록 홈즈식의 면밀함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연애에서 환상은 연애하는 중에 자신이 일상에서 발견한 사실과 변화의 내용을 포착하며 첫 발자국을 남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과 내용을 연인과 연관 짓고, 그 생각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연애에서 환상은 탄생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평소라면 결코 연관짓지 않았을 요소들을 하나의 캠퍼스 위에 배치하고 감정이라는 색을 칠하여서 뜻밖의 그림을 그려내서 연애의 환상은 그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연애의 환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분석력”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연애의 환상을 생산하기 위해서 뭉치로 존재하는 관찰물(observables)을 낱낱으로 분류하여, 각각의 의미를 찾고,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사실을 관련짓고 이야기를 붙이는 일련의 작업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뭉쳐서 구별이 잘 안되는 대상을 세분화할수록 환상을 생산할 수 있는 소재가 풍부해지며, 전혀 관련되지 않을 것 같은 소재들을 연결시켜 그럴싸한 이야기를 붙일 수 있다면 연애에서 환상이라는 이름의 이야기는 풍부해지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환상'은 '연애'라는 이름으로 연인들을 보다 견고하게 응집시키고, 연애를 더욱 윤택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연애에서 환상은 중요하지만, 환상 그 자체로만 의미를 평가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특히 분석하고 상상하려는 시도가 없다면 환상은 금새 소멸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정기간 연애를 지배하는 환상이 존재하더라도,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환상으로서의 의미가 퇴색될 가능성이 짙기 때문에 환상을 만들려는 노력없이 연애에서 환상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연애에서 환상의 부재는 연애를 풍성하고, 윤기있게 만들려는 노력의 부재를 때때로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환상이 부재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연인과 연애가 신비한 대상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간의 틀거리를 전환하거나, 분석의 기준을 세분하여 환상이라는 이야기의 범위를 재조정하고, 내용을 재구성하여서 연인과 연애를 재해석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한다고 선언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읽기 싫어진 순간, 모두 읽었다고 자만하는 순간 환상은 깨지며, 연인에게서 느낀 호기심은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만다고 하겠다.



    연인과 연애를 재해석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을 포기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연애와 사랑의 온도를 항상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에 대해서 더 이상 탐색할 것이 없다고 선언하며 연애의 종언을 고하는 방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더 이상 지금의 연애를 의미있는 것으로 믿으려는 마음을 포기한 이유를 상대의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환상을 재구성할 소재는 기준의 조정, 새로운 발견을 통해서 언제고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연애에서 환상의 부재는 노력의 부재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환상의 생성 역시 자기책임이라는 인식은 연애에 관한 일련의 결단을 내리는 데 신중함(prudence)을 더한다. 모든 것이 나의 부주의와 무관심이라는 생각은 연애에 관한 판단에 앞서 그간의 연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찬찬히 관조해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연애를 위해 환상이 필요하거든 환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환상의 부재가 연애를 지속할 이유의 부재를 반드시 의미한다고는 할 수 없다. 연애는 누차 이야기하듯이 생활이며 생활을 견고하게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감정적 지지는 굳이 환상이길 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상은 연애를 윤기 있게 만들기에 좋은 것이라는 점은 결코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결국 환상을 두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재론컨대 연애를 유지하는 데, 좋은 연애를 만들어가는 데 환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기다리지 말고 노력해야한다. 환상은 어쩌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부단히 상대를 관찰해서 숨겨진 모습을 발굴하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환상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환상이 필요하거든 연인과 연애를 관찰하고, 분석하여 요소를 발굴하고 자신의 상상력에 힘입어 요소들 사이의 전혀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분석과 상상에 입각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어 환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래야만 환상이 살려낼 수 있다.



연애법 여덟째.

매거진의 이전글 운명, 그 짜릿하고 아픈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